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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검심(るろうに心>(2012)과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君の膵をたべたい>(2018)


위기 critical 의식 없이 나오는 문화론에 비평성 criticality은 없다. 단지 현재의 합리화·정당화가 있을 뿐이다. -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일본정신의 기원』


인류 역사에 걸쳐 이루어진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과 자연과학, 예술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상황(환경)을 이해하고 알려는 탐구였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의 축적과 그 이해(해석)는 인간을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통한 위치지음(positioning)을 수행했다. 또한 지식의 축적과 이해는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조건과 환경에 대한 탐구를 통해 불가해한 영역을 축소시키고 인간의 편의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방법과 도구를 개발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인간은 지구상에서 자연의 구조와 규칙을 가장 많이 알아내고 활용하는 존재가 되어 지구 전체에 걸쳐 번성하며 문화를 형성하고 삶의 조건을 개선하며 살게 되었다. 행복이라는 유토피아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또한 존재했다. 


그러나 수많은 참혹한 전쟁과 재난을 겪으며 희망은 서서히 절망으로 변하게 되었고, 현재 상황도 절망의 먹구름을 걷어 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모든 것이 분명해 보였던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이 초점이 안 맞아 흐려지고 때론 굴절되어 보이거나 단절된 상태로 보이기도 한다. 인문학과 예술은 일찌감치 이러한 상태를 돋보기나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며 제대로 직시할 것을 권해 왔다. 혹은 그런 시각의 주체인 우리들 인간 자체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무대 위나 스크린 혹은 종이 위에 펼쳐놓기도 하였다. 단지 절박함을 느낀 사람들만이 주목하였다는 것이 비극이지만 말이다. 


 인간을 둘러싼 상황 혹은 상황에 놓인 인간을 스토리라는 상상력을 통해 보여주는 영상물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텍스트(text)가 될 수 있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hes)는 『텍스트의 즐거움 Le Plaisir du texte』(1973)에서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며 완결된 단일한 의미의 ‘작품’에 대비해 시니피앙(signifiant)의 무한한 의미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인 ‘텍스트’를 주장한다. 신의 영역처럼 모든 것이 완벽하고 철저하게 짜여진 구조적, 의미적 완결체로서의 ‘작품’에서 독자는 신(작가)의 의도와 의미부여를 찾으려는 수동적 역할에 머문다. 바르트는 일련의 문학작품 분석을 통해 어긋남, 불명료함, 모순을 발견해 낸 후, 그러한 독자의 역할에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그것이 바로 텍스트 개념이 가지는 유동하고 다면적이며 생산적 자유가 존재하는 과정과 충돌로서의 역동성이다. 바르트의 텍스트가 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개념이지만, 이는 영화를 비롯한 영상물의 분석과 해석에도 충분히 활용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독자가 발견하는 해석(텍스트)의 자유는 무한대로 허용할 수 있을까? 텍스트 개념만을 생각한다면 그렇다. 그러나 시간 혹은 공간을 혹은 시공간을 같이 하는 타인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더불어 설득력과 개연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것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 컨텍스트(context)이다. 텍스트가 문장이라면 컨텍스트는 문맥이다. 텍스트는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와 상징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텍스트를 공감과 설득력 있게 해석하기 위해서 컨텍스트를 수용하여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다른 텍스트 해석을 배제해서는 안된다. 모순되지만, 유일한 답은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유일한 답이기 때문이다.


 <바람의 검심>(2012)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전후한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액션영화이다. 주인공은 막부(幕府) 말기 반막부파를 위해 암살을 하던 인물로 메이지 유신이 성립된 이후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역날검을 들고 방랑한다. 자신이 원했던 평화롭고 약자가 보호받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하던 그 앞에 새로운 적이 나타난다. 사업가라는 미명하에 아편을 유통하고 일자리를 잃은 사무라이들을 고용해 자신의 제국을 꿈꾸는 인물이다. 영화를 표면적으로 보면 악을 응징하고 약자를 구해내는 액션영화의 루틴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12년이라는 일본사회의 컨텍스트를 통해 본다면 당시 관객에게는 다른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일본의 거품경제가 붕괴하고 장기 침체를 겪은 뒤 회복이라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2011년의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라는 재난을 맞기는 했으나 우려와는 달리 경제 회복이 서서히 나타나는 시기에 개봉한 이 영화 속에서 일본 관객들이 본 것은 새로운(새롭게 인식한) 적이다. 바로 인간을 도구화하며 자본 축적에 몰두하는 영화 속 인물이 상징하는 현실의 모습이다. 초과 근무와 과로사가 사회문제화 되고 고도경제성장과 풍요의 중심이라 여겼던 기업에 대한 신뢰에 의문이 제기되던 시기와 맞물려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시대를 떠나 현재화된 이면의 모습과 대면하게 되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8)는 웹소설을 원작으로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다. 다소 엽기적인 제목이 눈길을 끄는 이 작품(애니메이션)은 대인관계를 기피하는 남학생과 췌장 이상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지만 밝고 대인관계에 적극적인 여학생의 이야기이다. 미국의 스크루볼(screwball) 코미디를 원류로 하는 로맨틱 코미디에 가까운 설정과 전개를 보인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 좌충우돌하지만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 패턴이다. 평범한 일상과 진실을 공유하며 남은 인생을 보내고자 하는 여주인공의 바램에 동행하면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인생에 주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남학생의 스토리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많은 신조어가 탄생한다. 그 중에 국내에도 소개된 것에 사토리(さとり)세대,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 초식남(草食男) 등이 있다. 공통점은 대인관계를 최소화하거나 극히 제한한다는 것이다. 특히 가장 고립도가 심한 히키코모리의 경우 일본 내각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18년 기준 15세~39세의 경우 54만여 명에 이르며, 40세~64세의 경우 61만여 명에 이르러 연령을 불문하고 큰 사회문제임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적극적인 히키코모리의 경우 수치는 줄어들겠지만, 여전히 주목할 사회 현상의 하나임은 변함이 없다. 애니메이션에서 여주인공은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접촉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신체와 감정의 교류라고 얘기한다. 그것을 현실사회에서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서 거부하거나 거부당하는 소통의 문제가 벌어지고 있다는 컨텍스트에서 볼 때,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를 떠나 인간 삶의 양태에 대해서 새삼 생각해 보게 하는 애니메이션으로 해석 가능하다. 


컨텍스트를 통해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 또한 자유이지만, 거기에는 책임있는 윤리의식이 동반되지 않으면 안된다.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의 <의지의 승리 Triumph des Willens>(1935)나 <올림피아 Olympia>(1938)에 대하여 당시 대다수 독일인들이 받아들였던 컨텍스트 해석에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얘기한 비평성이 근거한 것이 바로 그러한 주체적인 윤리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일본문화전공 유양근 강사('영화를통한일본이해'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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