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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21년도 노벨 물리학상은 “복잡한 물리계(complex physical system)의 이해에 대한 획기적인 공헌”에 관한 업적으로 대기과학자 두 명(슈쿠로 마나베, 클라우스 하셀만)과 통계물리학자 한 명인 조르지오 파리시(Giorgio Parisi; 이탈리아 사피엔자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가 공동으로 수상하였다. 그런데 국내외의 주요 언론들은 대기과학자 두 명의 주요 업적인 지구 온난화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파리시의 연구 업적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있다. 


이는 지구 온난화 문제는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주제인 반면에 파리시가 노벨상을 받도록 한 대표적인 연구 주제인 스핀 유리(spin glass)는 일선 물리학자들, 심지어 통계물리학 전공자들조차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주제이기 때문인 것 같다. (국내에서 파리시의 연구 업적을 제대로 소개할 수 있는 학자가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스핀 유리를 연구하는 학자가 대부분 유럽, 특히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있기 때문이고 국내의 물리학자들은 미국의 연구 주제를 거의 따라가는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대기과학자 두 명의 연구 업적은 이미 소개된 여러 언론 기사들에게 맡겨두고, 20여 년간 스핀 유리를 연구해온 필자는 파리시의 업적에 초점을 맞춰 설명해 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파리시의 주요 연구 업적인 스핀 유리는 과연 무엇인가? 물리학적인 설명보다는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간단한 예를 통해 스핀 유리의 정의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우리 서강대 안에 신생 동아리가 하나 생겼다고 하자. 창립 멤버는 총 4명이다. (그 각각의 멤버를 1, 2, 3, 4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런데 이 4명이 모두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다. 1과 2, 2와 3, 3과 4는 사이가 좋지만 (이 좋은 관계를 +J로 표기하자) 4와 1 사이는 어쩐 일인지 사사건건 싸우는 사이이다. (이 안 좋은 관계는 -J라고 표기하자) 그런데 1번이 어느 날 2번에게 카톡으로 “위드 코로나가 시작되었으니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서 술 한잔하자”는 제안을 한다. 2번은 “OK”라고 동의한 후 (동의를 ↑로 표기하자), 3번에게 동일한 제안을 한다. 3번 역시 “OK”라고 동의한 후, 4번에게 제안한다. 4번 역시 3번의 제안에 “OK”라고 동의했으나, 잠시 뒤 이 제안이 1번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고서 이 제안에 반대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반대를 ↓로 표기하자) 이렇듯이 4번은 동의와 반대 두 갈림길에서 고민하게 된다. 3번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동의를 하고 싶은데, 1번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반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다시 생기면서 결정을 못 한 채로 쩔쩔매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바로 이 쩔쩔매는 상태는 바로 3번과 4번 사이의 +J인 관계 및 4번과 1번 사이의 -J인 관계로부터 생겨난다. +J와 -J라는 관계가 하나라도 바뀌지 않는 한 쩔쩔매는 상태는 바뀔 수 없게 되고 4번은 큰 고심에 빠지게 된다.


스핀 유리는 고착화된 +J와 -J가 무작위로 고체 안에 존재함(이 상태를 물리학자들은 quenched randomness라고 부른다)으로 인해서 그 고체 안의 스핀이 ↑와 ↓를 결정하지 못한 채 쩔쩔매는 상태(이 상태를 물리학자들은 frustration이라고 부른다)를 가진 특이한 자석을 말한다. 1970년경에 구리(Cu)에 망간(Mn)을 약간 첨가한 자석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이후 당시 최고의 고체 이론 물리학자였던 필립 앤더슨(Philip Anderson; 1977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이 이 자석을 스핀 유리라고 명명하면서 이 이름이 물리학계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스핀 유리의 특성을 가진 자석이 예상외로 대단히 많다는 점도 실험물리학자들에 의해 계속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앤더슨 본인이 다른 동료와 함께 1975년에 역사상 최초의 스핀 유리 이론을 제시하였지만, 후속 연구에 따르면 스핀 유리는 기존의 통계물리학적 방법으로는 자유 에너지, 엔트로피 등의 물리량을 엄밀하게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서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원래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했던 젊은 이탈리아인 천재 조르지오 파리시가 1979년부터 몇 년에 걸쳐 스핀 유리 문제를 통계물리학적 방법으로 물리량을 계산할 수 있는 새로운 계산 방법을 고안해 냄으로써, 스핀 유리 문제가 물리학적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파리시가 제시한 해결책이 대단히 강력한 도구임을 알게 되면서 이 계산 방식이 오늘날 AI의 기초 개념인 인공신경회로망(artificial neural networks) 및 유리창과 유리잔을 구성하는 유리(glass)의 물리학적 해석에도 직접적으로 활용되어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오늘날 스핀 유리 이론은 복잡한 물리계 이론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성공적이며 응용성이 높은 이론으로 인정을 받고 있고, 이러한 성공에는 조르지오 파리시의 천재성이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전인교육원 김도현 교수('과학사'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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