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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의 저명한 학자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는 중국은 각 시대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한나라 때의 부(賦), 당나라 때의 시(詩), 송나라 때의 사(詞), 원나라 때의 곡(曲), 그리고 명나라와 청나라 때의 소설(小說)을 각각 그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으로 꼽았다. 이 중 수많은 시 명작을 남긴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 같은 시인이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수호전(水滸傳)』같은 소설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시나 소설을 제외한 나머지 부, 사, 곡에 대해서는 오히려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정도로 생소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다소 생소한 위의 장르들에 속하는 작품이라도 뛰어난 성취를 이룩한 문제작들이 무수히 많아서, 이를테면 송나라 때의 대문장가였던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와 같은 절창은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어 널리 애송되어 온 세계적인 명작이다. 본래 ‘부(賦)’라는 글자는 세금 또는 병역의 뜻으로 쓰였으나 이후 생각을 펼쳐낸다는 뜻으로도 확장되어 부 장르는 작가의 생각을 감추지 않고 펼쳐낸 글이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실제로도 한나라 때의 「양도부(兩都賦)」, 진(晉)나라 때의 「삼도부(三都賦)」 등과 같이 거대하고 화려한 도성의 모습을 상당히 길고 자세하게 묘사하면서도 성찰적인 사색을 이어간 부 명작들이 다수 지어졌다.  「적벽부」도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섬세한 묘사를 펼쳐가고 있으나, 도성의 대규모 스케일에 초점을 맞춘 전작들과는 달리 인간의 내면적 고뇌에 대한 진지하고도 뜻깊은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작품은 화자가 자신을 찾아온 객(客)과 함께 옛 삼국 시대 적벽대전의 현장이라고 생각한 장소에서 배를 띄우고 놀면서 도도한 흥취가 한창 올랐을 때 객이 구슬프게 피리를 불면서 던지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수백 년 전 천하를 호령했던 조조와 같은 불세출의 영웅들도 이미 오래전에 먼지와 같이 사라지고 없는 마당에 이름 없이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인생은 더더욱 허무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무거운 질문이다. 선뜻 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대해, 화자는 자신들이 노닐고 있는 곳에 함께 하고 있는 강물과 달을 끌어와 대답을 시작한다. 강물은 늘 바다로 흘러가지만 강은 여전히 물로 가득하고 달도 끊임없이 차고 이지러지지만 여전히 하늘에 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순간이냐 영원이냐는 바라보기에 달렸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순간과 영원의 절대적 대비가 허물어지고, 허무가 의미를 잃는 지점이다. 게다가 순간인지 영원인지 모를 이 세상을 살면서 소유의 욕망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아무리 소비해도 무궁무진한 강바람 소리와 달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정감 어린 환희를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최고의 방편이라는 설명도 곁들인다. 화자의 논리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삶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객이 화자와 함께 밤새도록 낭자하게 술을 마시고 새벽에 서로를 베개 삼아 누워 새벽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글의 결말이다.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가 밀려올 때 용기와 힘을 주는 논리이고, 문장의 표현 또한 아름다워 원문으로 읽기에 도전해 볼 만한 명문이다. 다만 수업 시간에 「적벽부」를 소개하면서 다소 시간에 쫓긴 나머지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정도의 설명을 보태고만 뒤에 까닭 모를 아쉬움과 후회가 일어났고, 그 뒤에도 보충할 기회가 없이 시간이 흘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간략하게 그치고 만 해설이 못내 아쉽고 후회스러웠던 까닭은 정말 그렇게 마음먹기가 쉬울 것인가, 마음을 먹는다고 삶은 허무한 것이라는 공고한 명제를 정말 무너뜨리거나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인가, 보다 현실적으로는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특히 청년들의 곤고한 현재와 불안한 미래를 둘러싼 근본적인 문제들이 진정으로 해결된다는 것인가 등등의 생각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시지 못하던 중, 불우한 삶을 안고 살아갔던 당나라 때 시인들이 남긴 불후의 명시들을 해설하면서 노년의 회한 때문에 힘들다고 고백하신 우리 학과 원로 교수의 깊이 있는 사유가 담긴 신간을 읽고 다소 마음의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외롭고 허무함에 허우적거리는 삶은 비단 「적벽부」 속의 객만이 아니고 불우했던 시인들, 원로 교수, 그리고 나와 우리가 모두 똑같(았)을 것이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두 허무하고 모두 외롭다면 그런 인생 정도는 서로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면서 한번 살아볼 만하지 않겠는가. 이 생각을 꼭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추가하여 전달해 주고 싶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사유의 방향은 약간 다르지만, 김영민 교수의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도 다시 음미해 보고 싶다.


중국문화학과 이정재 교수(중국문학의세계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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