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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전>은 우리나라 고전소설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사람에 따라 열정적이고도 근대적인 사랑을 그린 <춘향전>이나 사회의 제도적 차별에 맞서 자신의 고귀함을 선언한 <홍길동전>, 또는 명나라 소설 <전등신화>를 모방하면서도 문학적 혁신을 자부한 <금오신화>를 대표작으로 꼽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모두 중에서도 작품에 대한 포폄의 극적인 변화까지를 고려한다면 단연 <심청전>은 문제작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심청전>은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고소설이니 말이 어렵기도 하겠지만 학생들이 <심청전>을 어려워하는 까닭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아비를 위해 딸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심봉사나 동네 사람들이 심청이를 가스라이팅해서 심청이가 그 모양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해석은 조금 잔인하다. 심봉사는 당연하고 동네 사람들도 (동냥젖을 먹였다는 점에서) 심청에 대해 일종의 부모-자식의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심청의 희생에 대해 그들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수혜자가 되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심봉사와 마을 사람들이 그러한 수혜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심청을 세뇌했다고 인정하는 것은 (실제로 소설이 그러한지와는 상관없이) 현실의 부모-자식 관계를 자기의 안락을 위해 서로를 도구화하는 ‘천륜 비즈니스’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잔인한 것은 천륜을 도구화하는 이 인간성 상실의 발상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부모가 자식을, 또는 자식이 부모를 팔아먹는 일이 있을 수 없는 현실이 아님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가스라이팅 된 심청을 연민하는 것은 실상은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사고무친의 ‘나’를 발견하고 두려움에 떨며 인간관계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반응으로 읽힌다. 잔인한 것은 해석이 아니라 해석이 딛고 서 있는 현실이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이런 해석의 잔인함을 넘어서야 하는 까닭은 그럴수록 <심청전>의 아름다움을 외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자면, 과거의 사람들은 모두 봉건의식에 쩌든 왕정주의자이고 충효열이라는 인간 착취의 이념적 폭력을 숭앙하는 도덕적 노예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시대의 산물이기에, 각 시대가 취하는 개별적 특수성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인간성 자체의 존립이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거기에 기반하여 피워낸 고귀함을 발견하거나 이해할 수도 없게 된다. 


<심청전>의 역사를 읽는 것은 이런 점에서 흥미로운 일이다. 만약 <심청전>이 효행을 널리 선전하거나 효녀 되기를 권장하는 수준의 작품이라면 이렇게 고전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문학 작품에서 도덕적 계몽을 읽어내고 그것으로써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매우 흔하고 익숙한 것이지만, 그래서 도리어 작품성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차단하기도 한다. 


아버지 심봉사가 공양미 삼백 석을 약속하고 집에 돌아와 후회의 눈물을 흘리던 날, 심청은 늦게 집에 온다. 아버지가 맹인이라는 설정은 탁월하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인간적 유약함에 대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장애 앞에서 이성을 잃었고 해서는 안 되는 약속을 하고 만다. 그러니 맹인인 것이다. 부처와의 약속을 어기면 억만년 지옥에 갈 거라며 좌절하는 아버지를 향한 심청의 반응은 역사성을 띤다. 아직 순서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있는데 안 주는 것은 죄이지만 없어서 못 주는 것은 죄가 아니다’는 반응이 먼저 나타난 것 같다. 그리고 다음은 심청도 함께 좌절하지만 아버지를 위로하는 것이고 마지막은 웃으며 아버지께 염려 말라고 자신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순서에 따라 아버지의 정체도 변한다는 것이다. 초기 <심청전>에서 아버지는 평범한 존재이거나 의젓한 사람이었는데 나중으로 갈수록 신분은 높아지지만 비속한 사람으로 나온다. 심봉사는 딸이 자신을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점점 의심스러워진다.


<심청전>의 역사는 아버지의 맹목성이 낳은 위기를 딸이 자신의 문제로 끌어안는 형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심청의 독립적인 결정이 존중되다가 나중에는 희생이 당연시되고 있다. 이는 현실에서 효 이데올로기의 교조화와 물론 관련이 있겠지만, <심청전>은 균형감각을 발휘한다. 아버지가 점점 비속한 존재가 된 것이다. 


우리는 왜 타인의 문제에 스스로를 연관 지어야 할까? ‘나’는 누구이며, ‘나’의 존엄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심청전>은 심청이 아버지의 눈뜨기를 신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심황후는 ‘맹인 잔치’를 열었으니까. 그럼 도대체 왜 심청은 물에 뛰어든 것일까?


국어국문학과 이정원 교수 ('고전소설텍스트읽기'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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