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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질적인(다른) 문화나 정신들이 만날 사이에서는 대립과 길항, 적응과 변용 등의 다양한 운동이나 작용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문화나 정신의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고 창조하는 있어 그것들이 적극적인 동력인이나 작용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상이한 정신들의 우연적 만남이 일어나는 순간 상호작용하며 발현되는 인간의 사유능력 또한 다르지 않다. 예컨대 전국시대(戰國時代)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쟁명하게 되었던 새로운 방법이나 상이한 관점들이 그러하다. 나아가 그로 인해 선진유가(先秦儒家) 같은 새로운 정신과 문화의 소영토(micro-territory) 창출되었던 것이다.


 순자(荀子) 라는 문헌 안에 가장 이질적인 공간이라 있는 곳은 저자(기원전 3세기 ) 유일한 시가문학 작품인  성상(成相)   () 편이다. 그가 이질적인 것들에 대해 적극적인 수용과 운용력을 갖고 있다고 말할 있는 까닭은 상이한 형식을 지닌 시경(詩經) 초사(楚辭) 융합을 통해 사대부의 문학과 통속적인 가요의 형태를 흡수하여 새로운 형식의 ‘사부(辭賦)문학 탄생시키는 창조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부에서 보여주는 그의 철학적 해석은 문학적 언급(글쓰기)들을 통한 문학철학에 다름 아니다. 순자는 철학적 개념들만 가지고 설득력을 높이는 데에 부딪힌 한계에 대해서 논리성과 문예성이 결합된 새로운(이질적인) 전달 방식을 찾았던 것이다. 부의 방식을 수용한 그의 철학적 글쓰기는 그가 문학적 이질성을 통해 유학의 글쓰기조차 지평을 넓히는 실험에 주저하지 않았음을 엿보게 한다.


특히, “실패한 []” 대해서는 소거하는 과정을 거치고, “이룬 []” 대해서는 재정립하는 일을 더함으로써 순자의 ‘방법으로서의 ()’ 말할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기존 유가가 고집해온 정명(正名) 대한 이의제기이며, 이것이 순자의 이질화이다. , 형식과 내용에서 차별화하며 이질화시킨다. 형식에 있어서는 동시에 여러 이질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고 포용[兼容而包]하며성상과 부의 독자층은 위정자층임에도 사대부 지식인이 향유하던 형식을 비틀어본다. 순자의 정명의 원리는 유가의 정합성에 맞지 않는 것은 소거하는 논리이다. 시가문학에서도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후왕의 유가적 논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절대적으로 탈락되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이질적인 것들을 서로 어울리게 조화시키는 작업을 통해 절충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순자의 글쓰기 실험은 이른바공간적 피구속성’(Ortsgebundenheit)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있다. 다시 말해 ()나라 출신으로 ()나라에서 공부하고 ()나라에서 중용된 인물인 순자가 여러 다른 국가의 체류를 통해 얻은 다양한 문화적 체험, 또한 초기법가가 득세하고 변법에 연이은 성공을 보여준 ()나라와 초나라의 사이에서의 군사적 긴장감과 같은 공시적 경험은 순자에게 종전과는 이질적인 새로운 창작의 시도를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의 문학적 글쓰기는 문학적 이상의 실천을 목적으로 것이 아니라, 사상적 일탈의 기법에 불과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겠다.


오늘날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에서 이질의 가치를 발견하고 창출하는 것은 다양화되고 다원화된 사회의 전제조건이 있다. 이질성이 긍정될 공존은 자연히 수반될 있기에 상이한 관점들 사이에서 양자를 결합하고 융합하는 방식은 계속해서 검토되어야 한다.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순자의 시대적 위기의식으로부터 나온 철학적 산물은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낳았다. 제자백가 시대에 순자가 겪었던 시대적 조건은 초연결, 포스트휴먼의 시대로 불리는 오늘날 사회의 대전환기와 다르지 않다. 오늘날 또한 초연결이라는 미증유의 이질적 가치 앞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없다. 초연결의 시대가 이질에 대한 순자의 정명 방식처럼 우리에게도 인식론적 단절을 요구하고 있다. 동질성이나 일체성, 합일성, 제일성 등은 이미인식론적 장애물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인교육원 김여진 교수 ('거꾸로, 다시 그리고 치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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