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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떤 이상적 인간상을 정할 수 있을까? 


사실 한 인간은 “다면체”이다. 그리고 그가 살아있는 한 이 다면체의 면 수도 모양도 계속 변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만드는 문화도 결코 획일적일 수 없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공동체 차원에서, 그리고 홀로코스트나 인종학살처럼 국가와 민족 차원에서 다양성의 부정은 계속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뭔가 하나를 정하고 싶어하는 걸까? 


한편 다면체성과 다양성을 인정한다 해도 우려스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타자에 대한 무관심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함께 감’이 아닌 단순한 병립일 것이다. 자아와 타자는 내가 성장하는데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그의 저서 <배제와 포용>에서 타자, 다양성을 배제하려는 형태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첫 번째는 홀로코스트와 르완다 인종학살에서 보는 것처럼 ‘제거’에 의한 배제이다. 이런 배제는 ‘동화’라는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이 경우 ‘너희도 우리처럼 살 수 있다’는 논리로 타자의 고유성을 말살한다. 두 번째 형태는 지배에 의한 배제로서, 타자에게 나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스스로 만족해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유기(abandonment)에 의한 배제인데, 볼프는 서구와 지구 북반구의 부자들이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그 예로 든다. 이런 배제의 양상에서는 자기 일에만 신경 쓰고 다른 이들을 못 본체 하는데, 성경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이 이에 속한다. 이 비유에서 강도를 맞아 쓰러져 있는 사람을 사제와 레위인(사제지파에 속한 사람)은 보고도 그냥 지나가지만, 이방인인 사마리아사람은 돌본다. 


제거 혹은 동화, 지배, 유기에 의한 배제는 ‘타자’로 규정된 사람, 문화, 공동체를 나 혹은 나의 공동체 안에 포용하지 않는 방식이다. 나, 그리고 나의 공동체의 문화 안에 ‘타자성’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못한다. 저자는 이런 태도가 때로 인류 역사를 얼마나 많은 증오와 분노, 피흘림으로 물들이면서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는지 지적한다. 사실 이런 배제의 메커니즘은 한국 사회 안에서도, 나의 공동체 안에서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서도 발생할 수 있다. 우리는 혹시 타자성의 포용이 나의 정체성을 위협한다고 느끼는걸까?


타자와 자아의 구별(differentiation)은 나쁜 것이 아니다. 생물체는 사실 구별 기제가 올바로 작동할 때 살 수 있다. 생물에게는 세포벽, 세포막이 있다. 따라서 자아와 타자의 구별은 반드시 필요하고 자아의 성립은 타자와 구별을 통해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이런 구별이 폐쇄성을 갖는 배제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구별은 타자를 향한 개방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개방을 통해 자아는 타자에게 향하고 타자는 나에게로 들어오며 이 과정을 통해 생물체는 성장한다. 이 ‘들고 남’이 멈춰버릴 때 세포는 죽은 것이다. 한 인간, 그리고 한 공동체의 성장도 이와 유사할 것 같다. 볼프가 말하는 것처럼 성장은 내 안에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할 때 가능하며, 여기에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저마다 자기 삶을 살되, 거대한 네트워크처럼 하나의 풍요로운 그리고 살아있는 인간 공동체가 된다. 


볼프는 타자를 포용하는 과정을 포옹(embrace)이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설명하는데, 포옹을 팔벌리기, 기다리기, 팔모으기, 팔벌리기, 등 4단계로 구분한다. 팔벌리기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일종의 불만족의 표시인데, 내가 되기 위해서는 타자가 나의 일부가 되고 나는 타자의 일부가 되어야 함을 알고 이를 원한다는 표시이다. 한 마디로 타자는 자아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인 기다리기는 타자를 향한 움직임이 일종의 ‘침략’적 행위가 되지 않도록, 자신 안에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자신 밖으로 나아가되 타자의 경계선 앞에서 멈추는 것이다. 그는 타자가 자신의 팔을 벌려주기를 기다린다. 기다림은 포옹이 상호성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신호이다. 세 번째인 팔모으기는 상호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헤겔의 말처럼 이 행위는 ‘자아의 행위인 동시에 타자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단계는 다시 팔벌리기이다. 이것은 포옹이 자아와 타자의 구분을 없애버리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 나와 너가 우리가 되지만, 이 우리는 나와 너가 병합해버린 그래서 내가 우리이고 우리가 나인 그런 형태는 아니다. 타자를 포용한다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이 보존될 수 있어야 하며, 나의 자아는 타자로 인해 더 풍요로와진 자아이다.


나, 그리고 공동체의 성장은 자아와 타자성의 이 역동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전인교육원 최현순 교수 ('그리스도교윤리'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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