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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적에 “모두 유교와 한자문화권에 속해있는데, 일본은 왜 저렇게 잘 살고, 우리와 중국은 못살까?”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이러한 궁금증은 내가 인문학의 연구로 나가게 되는 계기가 된 듯하다. 예전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회고해 보면, 역사나 윤리 시간에 고·중세와 관련된 역사나 사상 등에 관해서 배운 기억이 나지만, 근대 특히 현대 역사나 사상에 관해서 배운 기억은 별로 나지 않는다. 요즘도 이러한 경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중국철학의 경우, 공자·맹자 등 선진철학과 주자학·양명학 등의 연구와 교육에 집중하는 반면에 현대중국의 성립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근현대의 중국철학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현대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현대 동아시아가 성립되기 시작한 19세기 중엽의 역사로 눈을 돌려야 한다.


19세기 중엽은 동아시아, 특히 중국이 내우외환의 국가멸망과 민족멸종의 위기에 봉착한 시기였다. 반면에 서양은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본격화되어 경제와 사회정치의 발전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영국은 가장 먼저 산업혁명의 결실을 얻어 세계 제1의 지위를 차지했고, 나아가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식민지 개척과 통상국가를 찾는데 분주하였다. 영국이 찾는 대상이 된 것이 바로 광대한 토지와 거대한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대륙이었다. 1840년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역조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아편 판매를 하려하고, 중국은 이를 금지한다. 이러한 통상마찰로 인해 영국은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아편전쟁(1840-1842)이다. 이 전쟁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데, 철학적으로는 근대중국철학의 시점이고, 역사적으론 동아시아의 근대화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아편전쟁은 역사에 있어서 늘 있어 온 전쟁이 아니었다. 이 전쟁은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미래역사를 바꾸어 놓는 거대한 용광로였다. 세계에 군림하는 천조(天朝)라고 자부하던 중화제국이 반식민지·반봉건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합방되며, 일본은 명치유신을 통해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이처럼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동아시아의 이전과 이후의 운명이 갈리게 된다.


아편전쟁은 현대 동아시아, 특히 현대중국을 인식하는 단서이다. 그것은 서세동점의 본격적인 시작으로서 동아시아의 치욕의 역사인 동시에 근대화의 계기가 되었다. 세계 제1 이라는 오랜 몽상과 중화주의 세계관이 무너진 중국은 망국과 멸종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 선구자가 바로 위원(魏源)과 엄복(嚴復)이다. 특히 위원은 “오랑캐(서양)의 장기를 배워 오랑캐를 제압하자[師夷之長技以制夷]”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의 명제가 근대서양철학의 시작을 나타내는 것처럼, 근대중국철학의 시점을 알리는 철학명제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장기’가 무엇인지, 즉 서양 근대국가 형성의 뿌리인 근대성을 무엇으로 파악하는가에 따라 양무운동·변법유신운동 및 5·4신문화운동·현대신유학운동 등으로 전개된다. 양무운동을 주도한 증국번(曾國藩)·장지동(張之洞) 등은 서양의 ‘장기’로 위원이 제시했던 군사기술을 포함한 과학기술로 파악하고 국방과학과 철도 등의 공업기술 수용에 힘썼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청나라 봉건체제를 유지하면서 부국강병을 도모하였다. 이처럼 이들의 서양과 중국에 대한 현실인식은 아직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중국이 서양에 비해 낙후된 것은 군사기술을 포함한 물질문명일 뿐이고, 정신적인 측면은 오히려 서양보다 우월하다고 여겨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주장한다. 이러한 편협된 의식은 결국 1894년 발발한 중일전쟁의 패배로 깨지고 만다.


중일전쟁의 패배는 실제로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충격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중국은 이 중일전쟁의 여파로 인해 망국과 멸종에 대한 최고조의 위기의식에 빠진다. 따라서 그들은 양무운동에 대해 반성하고, 서양의 ‘장기’를 잘못 인식했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자각 하에 강유위와 양계초를 중심으로 변법유신운동을 펼치게 된다. 이들은 위원이 제기한 서양의 ‘장기’는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정치·경제·교육 등의 제도라고 파악한다. 즉, 서양의 근대국가를 만든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원리와 제도에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국가구성의 원리에 대해 낡은 제도를 새롭게 고쳐야 한다(變法)는 유신운동을 주창한다. 강유위는 ‘탁고개제’를 통한 대동세계를 실현하자는 대동(大同)설을 주장하였고, 그의 제자 양계초는 ‘변법’ 뿐만 아니라, ‘변심(變心)’, 즉 혈연과 지연에 의한 부민(部民)에서 국가의식으로 맺어진 국민(國民)의 의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신민(新民)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변법유신파는 사회정치적인 제도의 변혁과 새로운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으로 구국을 시도했으나, 아쉽게도 전제군주제를 유지하려는 세력들에 의해 그 꿈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 운동은 손문이 주도한 신해혁명으로 이어져 2천여 년 동안 중국을 지배해 오던 통치구조가 와해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이 탄생한다. 이 정치혁명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거대한 흐름은 과학과 민주를 외치는 5·4 신문화운동으로 발전된다.


신문화운동은 호적·진독수·노신·채원배 등에 의해 주도되어 1919년 5월 4일에 절정에 도달한다. 이것은 문화운동이라고 부르듯이 형이하학적인 물질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정신측면에 치중한 사고혁명 혹은 철학혁명이다. 아편전쟁 이후의 여러 사고실험이 결실을 맺어 진짜 ‘오랑캐의 장기[夷之長技]’를 찾아낸 것이다. 이 운동의 주역인 호적과 진독수는 서양 근대성의 근거를 민주와 과학이라고 파악하고, 이 ‘德先生(democracy)’과 ‘塞先生(science)’을 중국으로 빨리 모셔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공자를 팔아먹는 가게들을 타도하자[打倒孔子店]”는 구호를 내세우며 중국의 전제군주제·비과학적인 미신과 유교에 근거한 구도덕·팔고문을 타파해야 한다고 제창하였다. 이러한 신문화운동이 제기한 주장들은 이후 과현논전 등의 논쟁을 거쳐 맑시즘과 현대신유학으로 이어진다. 


1920년대 초기, 웅십력·양수명에 의해 성립된 현대신유학은 동·서문화의 융합을 통해 인류가 나아갈 미래의 길을 건립하고자 하는 세계적 철학운동이다. 즉, 서양문화의 비판적 수용과 동시에 중국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통해 중국적 가치와 삶의 의미뿐만 아니라, 세계가 지향하는 공동선을 수립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 목표는 모종삼·당군의·두유명 등에 의해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세계적 철학운동이다. 이에 비해, 진독수와 이대조의 맑시즘을 계승·발전시킨 모택동은 사회주의 국가를 성립시켰다. 이후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에 의해 자본주의적 사회주의로 발전한 것이 곧 현대의 중국이다. 이 중국은 요즘 아편전쟁 이전의 패권적 중화제국을 재현하려는 꿈[中國夢]을 꾸고 있는 중이다.


철학과 류희성 교수 ('근현대중국철학사'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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