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visual


프리모 레비(Primo Michele Levi)는 1919년에 이탈리아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는 화학을 공부했으나 졸업 후에는 반파시즘 운동에 참여하다가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1945년 해방 직전까지 아우슈비츠에 수용돼 있었다. 레비와 함께 수감된 650명 중에서 약 20명 정도만 살아남았다. 레비는 그곳에서 살아 돌아와 아우슈비츠의 기억과 경험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1947년 출판한 『이것이 인간인가』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세밀화처럼 복기해 냈다. 그는 왜 이 참혹한 경험을 다시 쓰려고 했을까. 


아우슈비츠에서 옷과 신발은 겨우 가릴 만큼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 가릴 만큼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 벌의 누더기 옷과 한 짝 뿐인 신발. 고된 행군 후에는 신발을 신지 못한 한 쪽 발에 상처로 곪아서 진물 냄새가 진동했다. 그렇다고 편히 누울 침대가 자기 몫으로 주어지는가 하면 그것 역시 그렇지 않았다. 자기 직전까지 침대에 누울 수 없었고 그렇게 주어지는 침대 역시 매번 자리가 바뀌었다. 자기 몫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변소나 샤워실에 갈 때에는 자기 짐을 모두 챙겨서 갔다. 훔치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일하고 자고 먹고, 아팠다가 낫거나 죽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빠르게 체득했다. 레비는 ‘수용소가 인간을 짐승으로 전락시키는 장치’라고 생각했다. 


혹여라도 이곳의 생활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다시 말해 언제쯤 이곳의 생활이 끝날 것인지 묻는다면 아마도 수용소 생활을 알지 못하는 신참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답을 몰라서 묻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일에 대해 관심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았다. 궁금해 하지 않았으니 질문 자체가 없었다. 혹여 누군가가 그렇게 물어본다면 돌아오는 답변은 ‘이유 없음’이었다. 홀로코스트는 물음을 품을 수 없거나 어떤 물음에도 설명 자체가 불가한 곳이었다. 내일이 없으니 희망도 없었고, 희망이 없으니 묻지 않았다. 그러나 레비는 늘 질문을 품었다. 


물론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관심 갖지 않았다. 레비는 그저 ‘174517’번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레비는 매일매일 왜 씻어야 하는지 물었다. 질문은 질문이었으나 실은 반쯤은 답변이 궁색하거나 변변치 않은 물음이었다. 어쨌거나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이지 않은가. 씻는 것과 씻지 않는 것에 차이가 없으며, 심지어 씻을 수 있는 물조차 겨우 나오는 상황이었으며 씻어봐야 달라지는 것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 의문을 품자마자 그 질문에 반하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슈타인라우프. 그는 온 힘을 다해 매일매일 열심히 씻었다. 그리고 레비에게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 씻어야 한다고 말해줬다. 


수용소의 사람들은 늘 배고팠다. 프리모 레비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늘 배가 고픈 짐승과 같았다. 그래서 배고프지 않은 그런 삶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엘리아스는 때때로 배가 불룩했다. 낯선 풍경이었다. 엘리아스는 재밌는 말을 곧잘 했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확실치 않지만 카포(수감자 중에서 선발된 독일 국적의 관리인)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일을 잘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런데 엘리아스는 종종 기회가 생길 때마다 도둑질을 했다. 누가 먹지 못해 배를 곯거나 해도 괘념치 않았다. 엘리아스는 수용소에 적합한 인간형일지도 몰랐다. 음흉한 잔인성으로 삶의 유일한 목표가 생존인 엘리아스. 그는 그곳에서 유능한 사람이었다. 프리모 레비는 엘리아스를 보며 ‘이런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게 아니라 어쩌면 ‘그런 결함들 덕분에’ 유능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적어도 그처럼 살아남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레비는 매순간 아우슈비츠의 질서와 풍경을 관찰했고, ‘이것이 인간인가’ 물었다. 그는 매순간 질문을 놓을 수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씻지도 않은 채 생존 본능만 남아 누군가의 몫을 아무렇지 않게 훔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는 ‘생명’뿐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와중에도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묻고 썼다. 그러므로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아우슈비츠의 생활을 다시 기록하려고 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책의 문장과 문장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의 공백 마다 각인돼 있는 것은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그의 오래된 물음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쓰는 것은 아우슈비츠를 토해내는 일이자 ‘인간’으로 다시 살아내기 위한 수행이다. 레비의 기록은 지금-여기에서 아우슈비츠를 다시 묻는 일이었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인간’답게 살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곳이 어디든 질문을 멈추지 않고 쓸 것이다. 혹여 수용소나 지옥이라 하더라도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자들은 쓸 것이다.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물었고 결국 ‘인간’으로 살아남았다. 


전인교육원 박숙자 교수 (‘인문사회글쓰기’ 강의)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