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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느린 것을 참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저(低)고속’ 인터넷은 용납할 수 없고, 비용이 더 들 망정 새마을호나 무궁화호 기차는 잘 선택하지 않는다. 우주를 가르는 로켓보다도 빠르다는 익일배송도 기다릴 수 없어서 실시간 장보기 어플을 이용한다. 방금 주문한 치킨이 지금 동네 어디쯤 와 있는지, 몇 분 후면 우리집에 도착하는지 분 단위로 보고를 받는다. ‘속도 문명’은 이렇게 우리 일상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진화 중이고, 속도 경험의 불가역적인 특성 때문에 우리의 몸은 더욱 빠른 것을 갈망한다. 


특히 교통수단은 속도와 효율성을 모토로 하는 기술 문명을 단적으로 구현한다. 국토 개발의 방향을 결정하고, 도시를 중심으로 한 공간 배치와 일상의 이동 문화를 재편하는 교통수단관련 정책과 문화는 속도 문명의 현황을 제시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핵심 쟁점일 것이다. 바퀴의 발명과 마차, 마차의 시대에서 증기 기관차와 자전거의 등장, 자동차 시대와 초고속 열차와 비행기 등 새로운 이동수단의 등장과 위기는 문명의 변화를 읽는 흥미로운 한 축이 될 수 있다. 오늘의 시각에서는 공감하기 어렵지만, 자동차가 상용화되기 이전에, 마차 이동이나 도보와 견주어 자전거가 속도의 상징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있으면 주변 환경을 지배하는 듯한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의 저자, 스티븐 컨은 타이타닉 호의 침몰은 19세기에 가속화된 속도에 대한 광기 어린 욕망의 상징임을 강조한다. 컨이 게오르그 짐멜의 『대도시의 정신생활』에서 포착한 핵심은 현대인의 시간 엄수 문화, 시간의 정확성에 대한 신뢰이다. 이 시기에 회중시계 생산과 유통이 급속히 증가하고, 노동 효율을 극대화하는 테일러리즘이 산업화의 토대가 되었으며, 탈산업화 시대에도 속도는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기차 여행이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의 공간 경험을 말소한 것과 유사하게, 자동차 이동은 ‘공간의 부재’를 강화한다. 비행기 이동은 이러한 부재 경험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일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학제적 지식인인 이반 일리치는 1974년의 저서 『에너지와 공정성』에서 에너지가 속도로 환산되는 교통에 있어서 에너지 과다 사용, 즉 과잉 속도와 사회 퇴보의 상관성을 포착한다. 그리하여 에너지 사용의 한계가 발생시키는 사회적 공정성 문제를 제기한다. 예를 들어, 대중적 수송수단이 시속 25킬로미터를 넘을 경우, 사회적 공평성이 저하되고 시공간 부족 현상이 나타난다. 일리치는 철도가 건설된지 50년도 지나지 않아 승객들의 이동거리가 100배 이상 늘어났고 더 빨리, 더 많은 곳을 이동하느라 자력에 의지한 이동(transit)은 제한된다고 강조한다. 20세기 초반 이후 지속적으로 확립된 미국의 자동차 중심 수송 체계, 대중교통인 철도와 버스가 배제되고 자동차와 비행기 장거리 이동 경향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가속화를 추구하는 시스템은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여 이동의 불평등, 기후변화 등 부정적 외부효과, 다시 말해 ‘가속의 비효율성’을 초래한다. 


속도의 맹목적인 가속화를 제한하고 외부 불경제(external diseconomy)를 해결하기 위해 일리치가 제시한 대안은 자전거이다. 자전거는 자동차가 점령한 도로에서 인간을 더 빠르게 이동시키고 인간의 행동반경을 넓힌다. 무엇보다 바퀴에 공기를 채운 타이어, 볼베어링을 결합한 기계인 자전거는 열역학 효율이 좋고 비용이 저렴하다. 인간의 행동반경을 넓히며 잃어버렸던 공간적 경험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수송수단에 의존했을 때의 소외에서 벗어나고, 수송수단의 속도가 높아질수록 공평성이 저하되는 현상 역시 보완할 수 있다. 자력 이동과 수송의 균형을 이룰 수 있고, 현재의 에너지 위기와 대기오염을 해소하기 위해 도시의 단거리 이동에는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물론 서구가 산업화의 절정에 이르던 1970년대에, 이러한 의견은 소박한 반(反)문명주의자의 복고 감성으로 폄하되기도 했고, 아직 ‘마이 카(my car)’도 경험해보지 못한 저개발 국가의 입장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주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산업주의자들은 오늘날 내연기관차가 퇴출되고 있고, 탄소중립을 실현해야 하며, 탈석유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상이나 했겠는가. 일찍이 근대적 합리성과 진보 이면의 인류의 위기를 감지한 일리치의 예언은 불행하게도 현실이 되었다. 급진적 사상은 늘 당대에는 비현실적이고 음험한 진단으로 배척받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에게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유럽문화학과 김지현 교수 ('현대인문세미나'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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