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visual


아큐는 중국 작가 루쉰이 쓴 소설 『아큐정전』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아큐가 유명한 것은 그의 독특한 생각 방식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신승리법의 주인공이자 원조가 아큐다. 아큐는 시골 어느 동네에서 날품을 팔며 산다. 요즘 말로 하자면 비정규직도 아니고, 동네 사람이 불러주면 일하고 그렇지 않으면 노는 알바생인 셈이다. 집도 없고, 재산도, 가족도 없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의 성도 이름도 모른다. 그래서 그저 아큐라고 부른다. 더구나 동네에서 가장 밑바닥에 놓인 그를 동네 건달들은 툭하면 때리고 놀린다.


힘든 삶을 산다. 하지만 아큐는 늘 즐겁다. 이유 없이 맞아도, 돈을 잃어도 금세 다시 즐겁다. 아큐가 지닌 독특한 정신적 비법, 바로 정신승리법 덕분이다. 아큐는 늘 현실에서 맞고 패배한다. 그러나 한순간 그것을 정신에서는 자기가 이긴 것으로, 승리로 바꾼다. 아큐가 현실의 패배를 정신의 승리로 바꾸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기 한껏 높이고 자기를 때린 사람을 하찮은 것들이라고 무시하면서 저런 하찮은 인간을 상대해서 무엇하겠느냐고 생각하는가 하면, 반대로 자신을 버러지 같은 인간이라고 한없이 낮추어서, 나는 맞아도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강한 사람에게 당한 것을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전가하기도 한다. 심지어 남에게 맞은 뒤 자기가 자기 뺨을 때려 자기에게 맞았으니 억울할 게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큐는 늘 맞고 패배하는데 자신이 왜 맞았는지, 왜 패배하였는지를 따져보지 않는다. 그저 그것을 심리 속에서 빠르게 승리로 전환하여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즐겁다. 패배에 대한 인식, 즉 패배감이 있어야 패배에서 벗어나는 걸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처한 힘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정직하게 인식하는 일은 충분히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런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애써 그런 현실에 대면하면서 인내하는 것이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이다. 그런데 아큐는 자신의 상황을 정직하게 인식하는 게 아니라 망상을 통해, 정신승리법이라는 심리적 조작을 통해 해소해 버린다. 그래서 패배를 반복한다. 늘 맞고 놀림을 당하는 삶은 계속된다. 그런데도 아큐는 즐겁다. 심리적으로는 즐거울지 모르지만, 현실 삶은 노예의 삶이다. 부당한 일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회피하거나 망상으로 해결하고, 강자에게는 약하고 강자에게 당한 폭력을 자기보다 약자에게 전가하는 비겁한 삶이다.


우리 삶이 고통과 절망에 처해 있을 때, 실패와 좌절 앞에서, 그리고 불가항력의 힘과 세력 앞에서 삶이 무너질 때 아큐가 즐겨 사용하는 정신승리법은 일시적인 마취 효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편 같은 구원이다. 환상과 망상 속의 구원일 뿐, 현실은 변하지 않고, 실패와 좌절, 절망의 삶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정신승리법에 중독되면 결국 노예의 삶을 산다.


그런데 정신승리법에 중독된 아큐에게 노예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찾아온다.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아큐도 혁명에 나선다. 다른 사람들처럼 공화제 국가를 세우려는 거창한 동기 때문에 혁명에 가담하려는 게 아니다. 그가 혁명에 나선 이유는 셋이다. 갖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해서, 원하는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동안 자신을 괴롭힌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다. 아큐에게 혁명이라는 정치 변혁은 한 번에 삶을 역전시킬 수 있는 로또 같은 것이다. 아큐가 이해한 혁명이다.


현실이 힘들면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승리법이 유행한다. 세상에 패배와 좌절, 절망이 일상인 사람들이 많을 때 정신승리법이라는 아편이 퍼진다. 그런 현실이 바로 아큐시대다. 그런 삶을 한 번에 역전시키고, 갖고 싶은 것을 다 갖고, 복수하고, 여자를 마음대로 차지하기 위해서 정치에 뛰어들고, 권력에 투신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도 역시 아큐시대다. 지금 우리 사회, 우리 시대에 아큐는 없는지, 아큐현상은 없는지, 루쉰의 아큐정전을 읽으며 곰곰이 성찰해 볼 일이다. 아큐와 아큐 현상은 병든 시대의 슬픈 징후다.



중국문화학과 이욱연 교수('루쉰과 현대' 강의)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