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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간다. 2019년의 마지막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폐렴 증상의 국지적 발발이 공식적으로 보도된 이래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 나가 모두의 일상 속에 파고들어 ‘코로나19’라는 약칭으로 자리잡게 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얘기다. 확산 속도와 범위는 놀라움을 넘어 경악과 공포를 자아내었다. 2020년 1월 30일 세계보건기구(WHO)는 ‘국제적인 우려를 자아내는 공공 위생의 위기상황’에 직면했음을 인정했고, 그로부터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코로나19를 팬데믹(pandemic), 즉 전 지구적 유행병으로 선포했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손 소독제를 지참하지 않은 날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고, 뉴스는 연일 어제의 확진자 수와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지역별로, 그리고 나라별로 집계해 보도하게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집 근처 산책부터 업무상 출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외부출입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노출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감수하며 수행해야 하는 일종의 과업으로 탈바꿈했다. 그에 따라 온라인 재택근무나 비대면 수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자리잡았고, 일터나 학교에서 늘 마주치던 동료들 및 친구들은 이제 어쩌다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든 사이가 되었다. 그 어쩌다 한 번도 모임 인원의 제한과 영업 종료 시간의 규정을 철저히 따라야 한다. 가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뿐만 아니라 그냥 보고 싶어서 모이던 한 끼 식사 자리에도 가족 관계 증명서와 같은 서류를 지참해 필요시 가족임을 증빙할 수 있어야 한다. 얼마 전부터는 여기에 예방 접종 증명서도 더해졌다.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고 다는 아니어도 대체로 잘 따르고 있는 위의 규제들을 굳이 하나하나 열거하며 되짚은 이유는 코로나19가 우리 시대에 끼친 영향을 재조명하기 위해서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코로나19가 일으킨 파장이란 전 지구적으로 계속되는 경제 불황이나 정치적 불안정보다도 더 근본적이며 총체적인 것인데, 바로 인류가 지금껏 영위해온 ‘관계’의 본질과 양상을 재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가족이나 친구, 동료라는 존재의 소중함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소명감으로 심신을 다해 일하는 의료진의 위대함을 새삼 깨달았다는 식의 마음 훈훈해지는 재고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우리는 서로를 ‘잠재적 보균자’이자 ‘예측 불가능한 위험 요소’로 간주하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식의 가슴 서늘해지는 재고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거리는 처음에는 물리적인 개념이었지만 분리와 차단의 의무가 삽시간에 전방위로 강요되면서 심리적인 개념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갑갑하더라도 ‘함께’보다는 ‘따로’여야 안전이 보장되며 외롭더라도 ‘더불어’보다는 ‘혼자’가 더 안심이 되는 모순적인 삶의 양식이 정착한 것이다.


그 결과 작금의 우리는 여태껏 소중히 여기며 이어온 관계들이 어쩌면 그다지 소중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단지 정황적 책임감이나 무난한 사회생활을 위한 가식적 동의에 기반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동안 윤리적, 도덕적,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적’ 올바름이라는 명목으로 유지되어온 많은 관계들이 상식의 무게에 억눌려온 반감과 불신의 분출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관계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겠지만, 보다 객관적인 근거는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목도된다. 특히 20세기 후반 냉전 시대가 막을 내린 뒤로 전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패권을 장악해왔으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패권의 지나친 독과점으로 지탄을 받아온 미국이 그 좋은 예다. 미국에게 코로나19의 창궐 및 대유행은 국제 사회에서 흔들리고 있는 자신의 입지를 다시 강화시키고 재정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코로나19의 발생지가 정확히 어디인지를 둘러싼 중국과의 끊임없는 비방전에는 최소한의 우호 관계를 지속하려는 시늉조차 던져버리고 유일한 강대국으로서의 단독성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서려있다. 그뿐인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풍족한 양의 백신과 성공적인 백신 개발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세계의 리더’라고 자평하던 나라로서 취해야할 이렇다 할 입장이나 정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세계보건기구와 주요 7개국 정상 회담(G7) 국가들이 연이어 백신의 원활한 유통과 광역적 나눔의 중요성을 호소하고 있음에도, 미국은 2021년 9월 현재 자국 내 백신 접종 완료율이 절반을 막 넘었을 뿐이라며 난색을 표하면서 동시에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추가 접종(booster shot)을 고려하고 있다. 국제 사회에 엄습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때 지난 국가주의가 재림한 것이다.  


물론 팬데믹의 극복 여부가 미국 하나에 달려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은 자력으로 또는 다양한 공조를 통해 감염율과 사망률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고, 아예 규제를 해제한 나라까지 등장할 정도로 조금씩이나마 통제가 가능한 ‘위드 코로나’의 시대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나아감에는 여전히 불안감과 씁쓸함이 담겨 있다. 우리가 ‘인류’라는 이름으로 이루었고 또 살고 있다고 믿어 온 ‘지구촌’이 현실이 아닌 허상에 불과함이 부정하기에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상호 협력적인 공존이 어려워진다면 당장의 나라는 살아도 미래의 세상은 불가능해질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암담한 불가능성에 대한 대책은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요인으로 꼽히는 코로나19로부터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코로나19가 종식되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게 될 거라는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전망은, 인간이라는 종(species)이 접촉을 통해 퍼지고 변이되면서 그 생명력을 보존하는 바이러스와 별반 다를 게 없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로크(John Locke)나 루소(Jean-Jacques Rousseau)를 위시한 많은 사상가들의 주장대로 인간이 애초에 서로간의 ‘계약’을 맺으면서 사회를 구성하고 문명화의 과정을 걷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접촉 방식을 탐색하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코로나19가 세계 최초의 팬데믹이 아니듯 최후의 펜데믹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영미어문전공 장기윤 교수(‘19세기 미국문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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