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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진달래꽃」은 잘 안다. 국민 시인이라 할 김소월의 대표작이면서, 지금까지 몇 번이나 대중가요로 리메이크되곤 했기 때문이다. 가까이로는 가수 마야의 <진달래꽃>도 유명하고, 1960년대의 박재란이나 최정자의 노래도 꾸준히 불리워 왔다. 누가 작곡한 지 알 수 없는 응원가 버전도 있는데, 필자 역시 학창 시절에 “진달래~오오오 진달래~오오오 진달래꽃 피었네”로 시작하는 흥겨운 가락을 목놓아 외쳤던 기억이 난다.


어떤 차원에서 보면, 1922년에 처음 발표된 이 소박한 혹은 우울하기까지 한 시가 이토록 오래도록 대중의 마음에 생명력을 지니고 살아남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현상에 해당할 것이다. 많은 훌륭한 서정시들이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우아한 곡조가 붙지 떼 지어 합창하는 응원가로 만들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진달래꽃」은 왜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사랑받고 있을까.


교과서에서 배우듯, 우리 민족의 정서를 잘 담았기 때문 혹은 민족적 율조로 노래했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진달래꽃」이 보여주는 사랑의 감정이 시대를 넘어서는 보편적 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는 구절이 내보이는 절실함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마음에 와닿는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한 점이 있다. “가실 때”란 미래이자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며, 시적 발화의 시간은 현재다. 즉 사랑하고 있는 시간에 사랑이 끝나는 시간을 가정하고 있는 발화다. 최선을 다해 사랑해도 모자라는 시간에 왜 당신의 마음이 변할 때를 가정하여 괴로워하고 있을까. 사랑의 시간에도 당신의 사랑이 식을 때를 생각하며 불안하고 초조한 이유는 내 사랑의 크기를 작은 마음이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대비한다. 이별의 순간에 매달리지 않고 쿨하게 보내줄 수 있기를 다짐하고 연습한다.


그런데 그렇게 쿨할 수는 없었나 보다. 당신이 가시는 길 앞에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뿌려놓을 테니,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고 하기 때문이다. 진짜로 영변 약산에 피는 진달래꽃을 따다가 뿌려놓을 리는 없으니 여기서 진달래꽃은 화자의 마음의 상징이다. 그런데 뭔가 진달래꽃은 열정적인 사랑이나 소중한 마음을 대변하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인다. 장미처럼 붉지도 않고 백합처럼 순결한 이미지도 아니다. 이른 봄이면 한국의 야산에 지천으로 피는 흔하고 소박한 분홍색 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 황량한 계절에 피어나는 꽃이다. 그러므로 진달래꽃은 평범한 사람이 지닌 사랑의 마음을 반영할 수 있다. 귀하지도 특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나에게는 유일무이한 마음, 황량한 시간에 온 힘을 다해 피워내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구절은 이러한 내 마음을 즈려밟고 가시라는 뜻이자 사실은 저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진달래꽃」은 아리랑에 담긴 마음을 계승한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와 ‘나를 버리고 가려면 내 마음을 짓밟고 가라’가 어떻게 다른가. 다소 직설적인 아리랑에 비해, 진달래꽃은 보다 우회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두 구절 모두 저주는 아니다. 당신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불안하다. 사랑을 마음의 에너지라고 한다면, 나한테 쏟아야 할 에너지를 몽땅 타인에게 쏟아부었으니 내 마음의 에너지는 상대가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되돌려 주지 않으면 에너지를 상실한 내 마음은 텅 비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고백은 당연히 순수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다. 되돌려 받기를 요구하는 고백이자 응답하기를 강요하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은 쉽게 응답해주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응답해주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사랑을 하는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스토커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사랑이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당신이 떠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까. 그때에는 텅 비어 깨어져 버린 내 마음을 보호할 장치가 필요하게 될 테다. 사실은 나도 별로 아쉽지 않았다고, 울고불고 매달릴 만큼 절실하게 사랑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토닥거릴 필요가 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반복해서 말해본다. 당신이 떠나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수한 교과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눈물을 흘리겠다’의 반어적 표현이 아니다. 이별로 인한 슬픔이 맺히고 맺혀서 한으로 변환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떠나도 지속될 내 사랑의 마음을 고백하는 것도 아니다.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내 마음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다. 그것은 당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나에 대한 사랑, 즉 당신에게 보낸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을 때 비로소 되돌릴 나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이쯤 되면, 다시 한번 이 시의 시제가 미래형이자 가정형임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아직 떠나지 않은 당신이 떠날 것을 가정하는 시다. 아니 이렇게까지 절절할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 보면 사랑의 현재보다는 미래의 이별에 더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화자의 사랑의 대상 즉 마음을 쏟아붓는 대상이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이 점하는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애써 부정하는 것이다.


사랑의 마음은 통제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당신을 향하는 내 사랑의 불가항력에 휘말리면서도 내 마음을 보호하려 애쓰는 것, 이럴 때 비로소 이 시는 미래에 대한 시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시가 된다. 화자의 사랑은 한없이 매달리고 끊임없이 희생하는, 그래서 모든 것을 내주는 사랑이 아니라 주체적인 사랑인 것이다. 그러니 이 시는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는 달리,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시가 아니라 사랑의 주체성에 대한 시다. 그리고 그 사랑의 고통에 대한 시다. 민족이 오래 간직해 온 이별의 정한을 계승한 현대시라든가, 침탈당해 왔던 민족의 한을 노래했다든가 하는 해석들은 화자의 복잡한 마음을 너무 간단하게 일반화한다.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걷어내면 「진달래꽃」이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이유가 보인다. 이 시가 보여주는 주체적 사랑의 고통은 사랑에 불안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기 때문이다.


국어국문학과 박슬기 교수('문학이란 무엇인가'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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