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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시험을 치르게 되면 사전에 학생들이 의례 묻는 말이 있다. 답은 객관적 정보를 쓰는 건가요, 아니면 주관적 견해를 쓰는 건가요? 철학은 종종 다른 학문처럼, 특히 수학처럼 하나의 객관적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사람이 백이면 백 다 다른 견해를 가지는 것을 수용한다는 선입견이 있다. 철학사 수업을 듣다 보면 수많은 철학자가 온갖 주제에 대해 그 철학자들의 수만큼 다양한 견해들을 제시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다양한 견해 중에 어느 것이 정답인지도 논란이 되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아마도 그래서 철학은 사실이나 진리를 추구하는 엄격한 학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해서 타인을 설득하는 것이라는 악의적 평가도 받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철학이 그저 하나의 상대주의적인 주관적 견해의 표명이라는 것은 너무 나아간 주장이다.


하나의 정답이 있어야 학문이 성립한다는 생각을 조금 포기하면, 이른바 철학에도 객관적이고 진리에 가까운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내 앞에 컵이 있다’는 사실처럼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적 사실은 아니지만, ‘경험적 인식은 그저 마음이 텅 빈 백지상태에서 수동적으로 외부의 자극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주관적 틀에 의해, 혹은 그 영양 하에 이루어진다’는 철학적 주장은 적어도 그 주장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혹은 철학자들의 세계에서는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객관적 사실을 표현한 것에 해당할 것이다.


객관적 사실은 이처럼 단지 내 앞에 컵이 있고, 또 컴퓨터가 있고, 집 밖을 나서면 길에 자동차가 다니며, 또 길 건너편에는 편의점이 있다는, 이런 경험적 사실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좀 더 추상적이고, 좀 더 보편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사실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예컨대, 우리가 인간의 통상적 지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미시세계나 혹은 거시세계의 사실들은 특수한 기구를 통해 파악되는 사실이든지 혹은 이론적 대상으로 구성된 사실들이다. 예컨대, 과학이 그려내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과 같은 이론적 대상들로 이루어진 사실세계는 인간의 통상적 지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세계 전체를 통상적인 지각의 경험세계보다 더 잘 설명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더욱더 실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물리학이나 화학과 같은 자연과학만이 아니고 경제학이나 정치학과 같은 사회과학이 그려내는 인간의 공동체 사회에 대한 사실이나 혹은 문학, 역사학으로 이루어진 인문학이 구성해 낸 인문적 사실들도 비록 오관을 통해 파악되는 구체적인 경험사실은 아니지만, 관련 전문가들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사실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실이란 그 사실을 둘러싸고 있는(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지주체들에게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의미할 것이다.


철학을 비롯한 각 학문의 목표는 자체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과 인간의 통상적 경험세계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연결하느냐일 것이다. 사회과학자는 사회과학적 사실에 인간의 통상적 경험세계를 성공적으로 연결하려 하고, 자연과학자는 자연과학적 사실에 인간의 통상적 경험세계를 성공적으로 연결하려 할 것이다. 이것이 그들 학문을 객관적인 학문으로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통상적 경험세계는 물론이고, 사회과학자들이나 자연과학자들의 사실을 철학적 사실과 관계시키는 기능도 수행해야 한다. 철학이 학문의 학문 즉 메타학문 내지 궁극적 학문, 혹은 가장 보편적 학문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자가 관심을 기울이는 ‘실체’, ‘속성’, ‘자아’, ‘정신’, ‘존재’ 등과 같은 고도의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개념들은 인간의 지각능력과 관련이 있는 ‘사람’, ‘나무’, ‘꽃’, ‘빌딩’ 등의 경험개념들과 연결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자연과학자들이 자연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하는 ‘물질’, ‘유전자’, ‘운동’ 등의 개념들과, 나아가 사회과학자들이 인간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하는 ‘계급’, ‘젠더’, ‘민주’ 등의 개념들과도 연결되어야 한다. 이것이 철학자가 철학을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의 객관적 학문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런데 철학을 통해 성립된 철학적 사실이 우리의 경험적 사실, 자연과학적 사실, 혹은 사회과학적 사실과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두 가지 연결고리가 있다. 첫째는 다른 사실로부터의 초월적 연결이다. 자연과학적 사실이나 사회과학적 사실들이 인간의 지각에 기초한 통상적 경험들에 의해 바로 확인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적 사실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성과들에 의해 바로 확정되지 않는다. 철학은 경험과학이 아니라 초월적 과학이기에, 나름의 철학적 방법을 통해 철학적 사실, 철학적 진리를 확정 지으려 한다. 철학적 방법이란 단순히 사용하는 개념들의 의미를 명료화하는 것이나, 논리적 증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통찰에 의해, 때로는 실용적 요구를 통해, 때로는 인식적 권리를 요구함을 통해 진행된다.


둘째는 다른 사실과의 내재적 연결이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철학 개념들은 자칫하면 경험적 적실성을 잃어버리고 그저 사변적인 활동에 종사할 위험이 있다. 개념적 운용작업에 능숙한 철학자들이 현실의 문제에 무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사실 철학의 보편적 추상개념들이 경험적 적실성을 잃는 것은 단순히 철학이 학문의 상아탑에 갇혀서 전혀 현실적 기능을 못 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만이 아니고, 그 보편적 추상개념들이 확고하게 파악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보편적 추상개념들, 예컨대 공자가 말한 인(仁), 플라톤이 말한 정의(正義) 등은 구체적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의 물음을 통해 보다 확고하게 이해된다. 즉 왜 특정한 행위가 인이 되고, 또 다른 특정한 행위가 인이 되지 않는지를 논의해야 하고, 왜 특정한 행위나 제도가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가 되고, 또 다른 특정한 행위나 제도가 정의되지 않은지 끊임없이 따져보아야 한다. 이렇게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인이나 정의와 같은 보편적이고 추상적 개념들이 이해되어야, 비로소 그 개념들을 우리는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다. 대학에서 철학 강의만 줄곧 해온 철학 교수들에게서보다 각종 SNS에서 구체적 정치 상황, 사회 상황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는 젊은 철학도들에게서 보다 확고한 개념이해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철학과 정재현 교수('양명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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