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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의 화두는 인공지능이다. 실력 있는 인공지능 전문가들이 국외로 많이 빠져나가버렸다는 푸념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1818년 영국산업혁명의 정점에서 탄생한 메리쉘리의 『프랑켄쉬타인』이 출판된 후 200년 정도 흘렀다. 갓 20살이 된 여성의 문학적 상상력 안에서 탄생한 인조인간과 비슷한 존재가 이제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가 보다. 최초의 인간이 지구상에서 살아오면서부터 우리는 온갖 시행착오와 역경을 통하여 현재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문명의 진보를 이루어 왔다. 하느님이 인간의 문명을 바라보며 자신이 창조한 인간이 참 훌륭한 존재라고 흐뭇해 할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여전히 대면해야 할 삶의 숙제들이 있다. 생명력 가득했던 우리의 몸은 병들어가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찼던 관계는 미움과 증오로 복잡하게 된다. 대자연의 냉철한 계산서 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신라시대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세련되고 지혜롭게 사랑과 죽음을 살아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2700년 전에 쓰여진 호머의 대서사시가 아직도 널리 읽히는 이유는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본성의 현실 때문일 것이다.


일리아드의 첫 시작은 '분노(menin)'라는 단어이다. 당시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최고의 장수 아킬레스의 분노이다. 자신이 선물로 받은 트로이 여인을 빼앗아 버린 그리스 총사령관 아가멤논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 패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분노이다. 용맹함과 더불어 전장에서 적군들에게 한 인간으로서 예의를 갖추었던 아킬레스는 사라지고, 분노에 사로잡힌 아킬레스는 피의 살육을 자행한다. 호머는 전쟁터에서 용맹함만으로 결코 영웅이 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아킬레스의 비영웅적 모습은 트로이 최고의 명장 헥토르를 죽이고, 그 주검을 돌려주지 않고 갖은 모욕을 저지르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작가의 상상력 안에서 가장 잔인하고 사악해질 수 있는 인간의 한 모습이 조각되어진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아들의 주검을 찾기 위해 늦은 밤 아킬레스를 찾아가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암 왕은 인간성의 회복을 보여준다. 노구를 이끌고 홀연 단신으로 적진을 찾은 프리암의 모습에 아킬레스와 그리스 장군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더욱이 자신의 아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갖 모욕을 자행한 그 두 손에 입맞춤하는 프리암의 행동은 현실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을 용서하며,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간청하는 프리암의 호소에 분노로 가득 찼던 아킬레스는 다시 타인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어둠을 풀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용서와 자비임을 보여주고 있다.


오디세이의 첫 시작은 '인간(andra)'이라는 단어이다. 오디세이는 10년 동안의 트로이 전쟁 후,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또 다른 10년 동안의 모험을 그리고 있다. 다양한 모험들의 특징은 죽음이다. 오디세우스는 모든 모험에서 항상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러한 과정에서 오디세우스는 지하세계로 내려가 트로이전쟁 막바지에 죽게 된 아킬레스를 만나 위로한다: “아킬레스여, 이 세상에서 당신만큼 축복받은 사람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살아 있을 때 우리는 당신을 신처럼 우러러 보았으며, 죽어서는 보다시피 이 지하세계를 지배하고 있으십니다. 그러니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 더 슬퍼하지 않으시길 빕니다.” 이러한 위로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킬레스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 살아 숨 쉼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한다: “영광의 오디세우스여 그 어떠한 말로도 나의 죽음을 위로하려 들지 마시오. 숨 쉬지 않는 죽은 자들을 이곳 지하세계에서 지배하느니, 차라리 세상에서 누군가의 노예로 살고 싶소. 아니,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겨우 살아가는 흙투성이의 가난한 소작농으로 살아가고 싶소.” 사실 아킬레스는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 신들로부터 2가지 선택을 받게 된다. 전쟁에 참여하면 명예와 영광을 얻겠지만 단명할 것. 다른 하나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장수할 것. 그는 목숨보다 소중한 명예와 영광을 선택한다. 그러나 사후의 아킬레스는 세상에서 명예와 영광보다,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소중한 현실인지 깨닫게 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우리 속담을 보면, 이승과 저승에 대한 생각은 동양과 서양이 한마음인가 보다.


고대 그리스사회에서 전쟁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용감하고 뛰어난 군인들을 격려할 수 있는 수단들이 필요했다. 호머의 대서사시는 부분적으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호머는 전장에서의 용맹함과 명예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전쟁이 없는 일상의 평화에 대한 그리움을 간절히 묘사하고 있다. 트로이 과거의 평화롭고 풍요로웠던 일상에 대한 곳곳의 회상들은 전쟁의 폭력으로 인하여 온갖 고통을 겪고 있는 트로이의 참혹함을 더 가슴 저미게 한다. 헥토르는 죽기 전 트로이 성벽을 따라 아킬레스에게 쫓기면서 트로이의 “고운 딸들이 번쩍이는 옷들을 빨곤 했던” 샘물 옆 그 “빨래통”을 지나게 된다. 메넬라우스는 전쟁을 마치고 스파르타에서 평화롭게 지내며 이렇게 말한다: “이 보물들의 3분의 1만 가지고 내 집에 머물렀기를 바란다.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아르고스로부터 멀리 떠나 거친 트로이의 땅에서 죽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기를 바라며.”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 빠른 시간 안에 동일한 질병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건은 인류 역사상 아마도 처음일 것 같다. 무엇보다 1년이 넘어가면서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고, 여행하고, 맛집을 다닐 수 있었던 일상이 그리워진다. 한편으로 지금 이 시간 현장에서 코로나로 고생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러한 일상에 대한 그리움이 죄송하기도 하다. 어려운 이때, 호머의 노래가 작은 위로가 되기를 희망한다.


영미어문학과 김치헌 교수('영문학배경'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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