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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 시스템은 그것이 작동하는 순간부터 변질하기 시작한다.” 몇 년 전 한 정치학회 발표에서 역사학도인 내가 한 말이다. 그러자 토론 시간에 바로 질문이 들어왔다. 그 말 멋있는데, 누가 한 말인가? 알려주면 나도 앞으로 인용하겠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든 말이라고 답했다. 순간 장내가 조용해지며 동시에 살짝 술렁거렸다. 정치학자들은 워낙 이론(theory) 싸움이 심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누구의 학설 어느 학자의 이론에 민감한 편이다. 그런데 역사학자인 나는 역사를 공부하며 인생을 살다 보니 자연스레 그런 통찰이 생겨났다.


학술 기고문을 왜 이렇게 칼럼 식의 얘기로 시작할까? 역사와 현실을 보는 통찰력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 소재로 잡은 게 바로 사회 시스템, 다른 말로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법률이나 사회적 규범 같은 제도이다. 이런 주제는 다양한 학문분과에서 다룬다. 정치학이나 사회학 또는 법학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연구한다. 그런데 각 학문분과의 연구방법론이 확고한 편이다. 그래서 장점도 있으나 단점 또한 많다. 가림막 때문에 좌우 옆을 이리저리 보지 못하고 그저 앞만 보며 달리는 경주마와 같은 모습을 21세기 상아탑에서는 흔히 본다.


역사학의 형편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 글을 읽을 대학생 시각에서 보자.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허다한 ‘시스템(제도)’을 배우고 암기하였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학교에서 들어봤을 골품제도나 과거제도는 그저 기초 수준이다. 수준을 조금 올리자면 대동법이나 헌법 같은 허다한 규정도 모두 시스템에 속한다.


그 중 하나인 대간(臺諫)제도를 살펴보자. 조선에서는 감찰과 간쟁을 담당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을 대간이라 총칭하였다. 따라서 대간제도란 곧 조선시대 언로(言路)제도이자, 지금으로 말하자면 언론제도라 할 수 있다. 통치자와 백성 사이의 소통은 고대 유가에서도 매우 중시하였다. 대간제도는 그런 소통을 전담하는 특별 기구를 중앙정부 안에 정식으로 두어 작동시킨 산물이다.


조선왕조는 대간들에게 두 가지 특권을 부여하였다. 하나는 국왕에게 정치를 똑바로 하라고 지적하고 간쟁(remonstrance)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고위 관료들을 탄핵할 수 있었는데, 그 특징은 풍문탄핵을 허용한 점이다. 풍문탄핵이란 탄핵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필요 없이, 사림(士林)이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만으로 탄핵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른바 사림의 공론에 기댄 탄핵이었다. 이 제도는 증거 제시 없는 탄핵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으나, 고위 관료를 탄핵할 때 완벽한 증거를 일일이 요구한다면 사실상 탄핵이 불가능해지겠기에 공론의 진정성을 믿고 실시한 제도였다. 여기까지가 대개 학교에서 다루는 대간제도의 내용이다.


 그렇지만 이런 본연의 취지가 현실에서 그대로 지켜질 리 만무하였다. 당쟁이 발발한 이후는 이를 나위도 없고, 그 이전에도 풍문탄핵을 악의적으로 이용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공론은 실종되고 이해관계에 따른 당론(黨論)이 난무하였다. 이러다 보니, 조선후기 이른바 실학자들은 대간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성호 이익은 대간제도 비판 이유로 풍문탄핵을 꼽았다. 16세기 말부터 이미 당쟁이 격화하면서 공론의 진정성은 실종되었다. 애초 좋은 취지의 풍문탄핵은 오히려 당론을 펴기 좋은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다산 정약용은 대간의 자질도 문제 삼았다. 대간이 정론을 펴기는커녕 시류에 편승해 상하좌우의 눈치나 보고, 공석에서는 법을 운운하며 엄히 문책하면서도 사석에서는 직책상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말을 바꾸기 일쑤인 세태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특히 공론이란 누구나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대간에게만 그런 권한을 부여한 결과 오히려 언로가 막혔다고 질타하였다. 언로를 보장하려던 대간제도가 오히려 언로를 막고 훼손하는 주범으로 작동하니 차라리 없애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대간제도를 긍정적으로만 볼 뿐, 그 이면의 심각한 폐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사회 시스템도 생명체처럼 계속 변하며 진화한다는 상식을 도외시한 역사 공부의 우스운 일면이다. 1990년대부터 크게 유행한 ‘유교 민주주의(Confucian democracy)’ 담론도 마찬가지다. 어떤 시스템 곧 제도 본연의 취지에만 열중했을 뿐 그 실제 작동 양상에는 둔감했던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제도를 다른 나라에 이식할 때도 반드시 변질할 수밖에 없다. 그 제도 이식 전 수백 년 이상 그 나라의 공간에 켜켜이 쌓인 역사적 경험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옛날 대간제도를 현재로 끌어온다면 언론제도가 가장 유사할 것이다. 기자에게 취재원을 밝히라고 추궁하지 않는 이유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풍문탄핵을 허용한 것과 같은 이치다. 보도기사에 대해 일일이 취재원과 출처를 밝히라고 윽박지른다면, 사실상 기자더러 기사다운 기사를 쓰지 말라는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우리 사회는 기자의 취재원 공개를 강제하지 않는 불문율을 관례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풍문탄핵이 처절하게 타락했듯이, 취재원을 꼭 밝힐 필요 없는 요즘의 언론도 심하게 타락하였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공론 또는 정론이라 간주하기 힘들다. 정치철학도 없다. 정론을 향한 염원도 사그라들었다. 반대와 혐오 그리고 비방성 기사로 하루 지면을 도배하기 일쑤이다. 이런 점에 생각이 미칠 때, 역사가 단순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완료진행임을 깨달을 수 있다. 역사학이야말로 현재를 고민하는 학문임을 알 수 있다.


사학과 계승범 교수('조선시대사'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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