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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대한 사상이 ‘5분 유튜브’로 요약된다. 어쩌면 10분까지는 용납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길어지면, 그것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구독과 좋아요’를 받을 자격은 결코 획득할 수 없다. 모든 필요한 지식은 10분으로 압축돼야 하며, 모든 심오한 사상은 짧고 쉽게 간추려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제 10분이라는 시간은 가히 우주의 광활함에 맞먹는 단위가 된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이론도 10분을 초과하면 그대로 아웃이다. 시쳇말로, ‘얄짤없다.’ 세상에 볼 게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10분이 넘어가는 인문학 강의를 듣는단 말인가. 무엇이든 10분 (이하) 단위로 편집되는 우리의 이른바 ‘100세 시대’는 그야말로 온갖 요약본들의 무한 도전이 끝없이 펼쳐지는 세계다. 그것은 때로 무모하고, 대개는 무례한 도전들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무례함에 대해 정색하고 문제 삼는 사람은 없다. 무기력 때문이기도 하고, 무관심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런 ‘꼰대짓’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반응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렇게나 많은 ‘좋아요’들이 매일 매 순간 생산되는데, 이렇게도 심한 무관심이 온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니. 나로서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경악의 표현은 그러나 ‘꼰대스러움’으로 인식될 공산이 크다.)


이토록 기상천외한 세상에서 문득 누군가 묻는다. ‘놀면 뭐하니?’ 돌아오는 대답은 이렇다. ‘몰라서 묻는 거야? 유튜브 하지.’ 날마다 하염없이 유튜브를 클릭하는 ‘나’는 정말로, 말 그대로, 오롯이 ‘나 혼자 산다.’ 사뭇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다 같이 ‘나 혼자’ 사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이렇게 바꿔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 그냥 인스타 하지. 달리 할 게 있어? 인스타 계속 스킵하다 보면 하루 금방 지나가.’ 여기서 인스타의 자리에 다시 카톡, 페북, 틱톡, 트위터, 주식, 게임 등 다른 무엇을 삽입하더라도 전혀 문제없으리라. 혹시라도 유튜브와 인스타(와 기타 등등)의 차이에 민감하게 (혹은 진지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 그는 이미 자격 상실이다. 그런 생각은 필경 10분을 훌쩍 넘기는 고민으로 이어질 테니까 말이다. 노상 그런 고민에 빠지는 사람은 100세 인생을 꿈꾸기가 어려울 것이다. 100세의 자격은 무례한 요약본들에 대해 무람없이 대응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위대한 이름이 삽시간에 ‘핵인싸 브랜드’ 속으로 융해된다. 언젠가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름이 한국 TV 드라마에 등장한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그렇게 경악했던 사건이 이제는 마치 구석기 시대의 일이라도 되는 양 아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가깝거나 먼 미래에 혹여 칼 마르크스의 이름을 딴 투자 회사, 한나 아렌트의 얼굴을 내세운 용역업체가 떡하니 등장하는 넷플릭스 드라마가 나올지 말이다. 그 드라마를 보고 자라는 세대에게 마르크스와 아렌트는 그저 허구적인 상표명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세계는 그야말로 ‘찐’ 무차별성(Indifferenz)의 시대다. 미상불 중국에서 트럼프 불상(佛像)이 불티나게 팔리는 세상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세상이라면 레닌 묵주 혹은 마윈 십자가상이라고 나오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그뿐인가. 소위 ‘본격 문학’을 한다는 작가들이 아무렇지 않게(=진솔한 고민 끝에)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들어가고(=연예인이 되고), 가치와 진리와 질서를 논하는 강연이 자극과 (자극을 잊게 해주는) 힐링과 (힐링을 잊게 만드는) 자극을 원하는 예능과 만나 화끈하게 ‘썸타는’ 시대가 아닌가 말이다.


우리 시대의 무차별성을 상징하는 사례를 꼽으라면, 『책은 도끼다』라는 책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애초에 ‘책은 도끼다’라고 말한 이는 프란츠 카프카지만, 그가 저 문장을 썼을 때 가졌을 애끓는 고민과 복잡한 맥락은 모두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오늘날에는 저 책 덕분에 카프카의 고뇌가 그저 ‘섹시한’ 광고 문구처럼 사뿐히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짐작건대, 이제는 ‘카프카’ 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떠올릴 사람이 부지기수일 것이고, ‘책은 도끼다’라는 문장을 들으면 대부분 광고 전문가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릴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냐고? 전혀. 아무 문제 없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신민으로 태어나 독일어로 글을 쓰다가 체코인으로서 세상을 등진 100년 전의 유대인 작가가 ‘인문학으로 광고’하는 동시대 한국인 ‘작가’보다 더 융숭한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 물론 그런 것은 없다. 광고인의 책은 카프카의 문학을 단 10초, 아니 1초 만에 가볍게 제압했고, 그 공로는 십분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사실 많은 독자들이 이미 구매를 통해 그에게 ‘좋아요’를 선물해 주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책은 도끼다』는 유튜브 문화에 최적화된 책이다.


위대한 대학에 대해 생각한다. 아인슈타인과 마르크스의 저작을 온전히 건사한 도서관을 가진 대학은, 말하자면 최후의 보루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역병의 창궐로 인해 여타의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대학 역시 백척간두의 위기에 직면했다. 오늘날 대학은 유튜브의 매력과 대결해야 하고, 핵인싸 브랜드의 위협에도 대처해야 한다. 핵심은 결국 ‘10분’의 우주를 폭파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위대한 과업이다. 끝끝내 ‘10분’으로 쪼그라들지 않는 대학만이 100년 뒤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구독 & 좋아요’의 가공할 폭탄 세례 속에서도 끝까지 토론과 논쟁의 참호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 아니, 절실하다. 지금 비대면 강의실(?)에서 저마다 홀로 분투하는 대학생들이 마침내 100세가 되었을 때, 그때 그들의 책장에 플라톤과 카프카의 책들이 꽂혀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말이다. 이제 시간과의 싸움은 대학의 사명이 되었다.


유럽문화학과 조효원 교수(‘유럽문화와 종교’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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