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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에 갔다. 2015년이니까 벌써 6년 전. 흔하지 않은 경험이고, 내 연구에 또 다른 시각을 갖게 한 계기였다. 이 글에서 그 경험을 얘기해 보려고 한다. 인천공항에서 프랑스 파리, 칠레 산티아고를 거쳐 칠레 땅끝마을 푼타아레나스까지 비행시간만 30시간. 그나마 여기까지는 정기 항공기여서 일정 예측이 가능했다. 남극에 들어가는 마지막 단계에서는 전세기를 이용해야 한다. 바람이 세면 아예 뜨질 않는다. 바람 잠잠한 날을 기다려 다시 2시간을 날아 잔자갈로 만들어진 활주로에 내렸다. 드디어 남극. 신기함 가득한 맘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커다란 인공물은 사라지고 나지막한 높이의 간이 건물 비슷한 것 몇 개. 그리곤 눈 녹은 질퍽한 땅과 일부는 눈이 쌓여있는, 바람 센 낯선 풍경.  여전히 세종기지까지는 바다를 건너 30분 정도 더 가야 하는데 파도가 세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러시아 극지 기지에서 5일을 기다린 후에야 세종기지에 가는 고무보트에 탑승할 수 있었다. 내가 도착한 1월은 남극의 여름(섭씨 0~5℃의 여름!). 여전히 한쪽은 눈이 가득 쌓여 있지만, 녹은 눈에 땅은 질퍽하고 추위에 깨진 큰 자갈들이 이곳저곳에 노출 돼있었다. 그 사이에 자라는 수많은 이끼들. 남극의 추운 겨우내 숨죽이고 있다가, 여름에 반짝 자신을 내보이는 이끼들이 남극의 여름 들판을 장식하고 있다. 그렇다. 이들 이끼가 나를 이 먼 미지의 땅으로 이끌었다.


극도의 고온 등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조건에서 식물은 스트레스를 받아 잘 자라지 못한다. 한 자리에서 일생을 보내야 하는 식물은 이 스트레스를 잘 다뤄야 한다. 잘못 다룬다는 건 죽음을 의미한다. 나는 식물이 이런 스트레스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공부한다. 어떤 유전자가 스트레스 속에서 식물의 생존을 높이는지를 공부한다. 이끼는 이런 스트레스에 어떻게 잘 견디게 되었을까? 스트레스에 잘 대응하는 유전자를 가진 건 아닐까?


남극 이끼의 한 유전자를 모델 식물인 애기장대에 넣어주었다. 이 유전자를 PM(P는 극지의 Polar, M은 유전자 이름의 첫 글자)이라고 하자. 사실 애기장대에도 이것과 유사한 유전자가 있다. 단맛 수용체 유전자가 사람뿐만 아니라 원숭이에게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 사람의 것과 원숭이의 것이 기능적으로 동일하게 단맛을 느끼게 하지만, 분자 수준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렇듯, 남극 이끼 유전자 PM은 애기장대 유전자 AM(애기장대 Arabidopsis의 A와 유전자 이름 첫 글자 M)과 분자 수준에서 약간 다르지만, 유사한 기능을 할 것으로 예상됐다. 애기장대 AM은 고온스트레스에서 식물에 저항성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 남극 이끼의 PM 유전자와 고온스트레스 저항성이라. 혹시 하는 마음에 분석해보니, PM 유전자가 들어간 애기장대 역시 AM 유전자가 도입된 애기장대처럼 고온스트레스에 잘 견뎠다. 결국 애기장대 AM 유전자나 남극 이끼 PM 유전자 모두 유사한 기능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이 남극 이끼 PM 유전자가 도입된  애기장대는 염스트레스(소금과 같은 짠물에 의한 스트레스)에도 잘 생장한 반면, 애기장대 AM 유전자가 도입된 식물은 염스트레스에 잘 생장하지 못했다. 같이 고온저항성을 갖게 하는 유전자로만 알았는데, 남극 이끼 유전자 PM이 온대식물 유전자 AM보다 스트레스 저항성 측면에서 우수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남극은 식물생태가 크게 발달하지 않아서 풍화되고 분해된 많은 염(salt)들이 생태적으로 회전하는 것이 적다. 따라서 그 많은 염들이 흙에 누적된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 살아야 하는 남극 이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를 기능적으로 최적화해서 사용해야 했던 건 아닐까?


남극 방문과 남극 이끼 유전자의 연구는 생물의 다양성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해줬다. 형태만 다른 게 아니라, 생리적으로, 유전적으로 다양한 생물체들이 여러 다른 환경에 적응하여 살고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런 적응에는 유전자의 최적화가 포함된다. 따라서 여기저기 흩어져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식물들은 결국 다양한 유전자의 보고다. 여기에서 우린 무엇을 배울까? 생물과 유전자 기능의 다양함 속에서 지적 즐거움을 느끼는 게 첫 번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비전공자들이 더 관심이 있을 수 있는 두 번째는 이런 유전적 다양성을 활용하는 일일지 모르겠다.


작년 노벨 화학상은 유전자가위 CRISPR /Cas9 기술에 돌아갔다. 본래 세균의 바이러스에 대응하는 면역 시스템인 CRISPR/Cas9을 응용한 이 기술은 특정 유전자를 편집하고 교정할 수 있게 해줬다. 궁극적으로 외부유전자를 생물체에 도입하지 않고도 생물체의 형질을 개선할 수 있는 기술인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남극 이끼 PM 유전자와 애기장대 AM 유전자를 예로 들자. 유전자 가위를 통해 AM이 PM 유전자의 우수한 스트레스 저항성 기능을 갖도록, AM 유전자를 편집하고 교정할 수 있는 것이다. 즉, PM과 AM 유전자의 분자수준의 차이(DNA 염기서열)를 연구해, PM 유전자에 우수성을 부여하는 DNA 염기서열을 AM 유전자가 갖게 해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string'이란 단어에서 'i'를 'o'로 바꿔 'strong'으로 바꿔주는 격이다. 이런 변화는 자연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화로 기존의 GMO 방식과는 다른 비GMO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무궁무진한 활용 가능성으로 노벨상을 받은 CRISPR/Cas9 기술을 이용하기 위해 생물체와 유전자의 다양성을 잘 이해해야 하는 세상이 됐다. 본래 생물학은 다양성을 공부하는 학문이었다. 그러나 실험실로 들어가자 시각이 매우 협소해졌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협소한 시각에서 발견된 CRISPR/Cas9 기술이 우리를 다시 생물과 유전자원의 다양성에 눈을 돌리게 한다.


생명과학과 이병하 교수 ('식물발달생물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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