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visual

지금보다 훨씬 폭력이 일상적이었던 나의 학창 시절. 유독 강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체벌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미술 시간. 나는 옆에 앉은 친구와 잡담을 하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그렇게 떠들고 있는 걸 몇 번을 참았을 미술 선생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거기 떠드는 놈들, 앞으로 나와!” 우리는 민망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교단 쪽으로 나갔다. 수업 시간에 떠들어 놓고 여전히 웃음을 짓고 있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나는 여태껏 받아보지 못한 체벌을 경험하게 되었다.


미술 선생님은 불려 나온 우리 둘을 마주 세운다. “정일영, 너부터 뺨 한 대 때려.”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곧 팔을 들어 친구의 뺨을 살짝 친다. “장난해? 세게 때려.” 이번엔 친구가 나의 뺨을 때린다. 여전히 아프지 않다. 또 한 번 뒤에서 미술 선생님의 고함이 들린다. 조금씩 힘을 주면서 서로의 뺨을 때린다. 결국 몇 분간 서로의 뺨을 때리다 보면 남는 것은, 붉게 상기된 뺨과, 맞지도 않았는데 상기된 얼굴과, 그렁그렁한 눈빛과, 그리고 어색함에 서로를 쳐다보지 못하는 두 명의 ‘친구’뿐이다. 어쨌거나 서로 구타를 한 셈이 되었으니 원망 비슷한 감정도 들고 자책 비슷한 감정도 생긴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답을 하기 쉽지 않다. 아니 답은 없다. 실질적인 가해자는 우리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으니까.


2012년 개봉한 [두 개의 문]이 내게 유독 좋았던 이유는,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망루에 올랐던 사람들과 현장의 경찰들을 이분법으로 대비시켜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묻지 않았다. 영화는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시위대나 현장 경찰 모두에게 위험천만한 과잉진압 명령을 내린 사람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명령은 직접 명령을 내린 사람의 책임만이 아니라 더 위에서 ‘비명령적 명령’을 내린 사람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니, 구조를 만든 사람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것을.


피로 점철된 대한민국의 역사를 훑어보면, 공권력이 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된 경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격한 시위 현장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정적을 제거하거나 독재에 항거하는 인사들을 고문하고 좌절시키기 위해 공권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잔인한 방식으로 폭력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반복과 순환은 광복을 맞이했던 그 시절, 사상적인 좌표와는 상관없이 ‘공적 정신을 가진 인간’들을 무차별로 토벌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폭력이 그 싹을 자르는 데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침묵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침묵한 자들은 자책으로 마음 속에 상처를 가득 만들거나, 반대로 자신을 합리화할 수밖에 없다. 그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가 되고, 모두의 손은 더욱 더러워져 간다. 이 현상이 지속될수록 침묵한 자들의 반응은 합리화 혹은 무시로 쉽게 이어진다.


어쩌면 구조적인 폭력이나 부당함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폭력의 싹을 자르지 않으면 어느새 엄청나게 성장한 폭력으로 다가와 우리의 입을 막아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작은 사안에 대해선 너도나도 한마디씩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엄청나게 덩치가 커졌을 때, 그에 대해 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 쉬울 때 대처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한 번 봐주고 넘어가다 보면, 그것을 멈출 기회는 모두 사라질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미술 선생님이 서로의 뺨을 때리라고 했을 때 왜 저항하지 못했느냐, 결국 친구의 뺨을 때린 것은 너 아니냐, 물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아이는 똑같은 상황에서 그렇게 못하겠다고 저항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떻게 저항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아니다. 과거에 어떤 행동이 있었음을 정확히 인식하고 오늘날 그 사건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왜 문제인지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캐내지 않고, 피해자에게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 너의 책임은 없느냐, 너는 흠집 하나 없이 고결하냐고 묻는 일은 너무나도 쉽고 또 실제로도 너무 많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쉬이 가하는 2차 가해를 보라.


피의 땅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현대 한국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 위에 서 있다. 그 고통과 죽음은 다시 침묵을 만들었고, 지금 우리는 그 진상의 대부분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매우 불편하고 고개를 돌리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잘못이 자행될 가능성을 키울 것이다. 현재는 과연 구조적인 폭력이 사라졌는가? 자본의 폭력은 더욱 교묘하고 집요하다.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가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을 잃고, 대다수의 여성 노동자가 차별과 성적 폭력을 당하고 있으며, 지쳐 잠든 택배 노동자가 다시 깨어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걸 우린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해고노동자 김진숙씨가 다시 암투병을 해야 한다는 소식에는 “암덩어리가 암에 걸렸다”는 댓글이 달리고, 직장 내 성폭력 이슈는 ‘불편한 문제’로 여겨진다.


구조적인 문제로 생긴 타인의 문제가 내 일이 되는 건 시간 문제다. 우리 사회 내부의 일도 남의 일로 치부하면서, 다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도의적 책임을 지고 반성하라는 이야기를 과연 할 수 있을까? 연대는 배부른 소리가 아니다. 이 사회의 구조적인 폭력은 러시안룰렛과 같다. 이 사회를 살고 있는 다른 이의 잔혹한 현재는 나의 미래이기도 하다.


정일영(‘한국현대사’ 강의)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