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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미국의 중국사 학자 프라센지트 두아라(Prasenjit Duara)의 저명한 책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Rescuing History from the Nation: Questioning Narratives of Modern China)』를 패러디한 것이다. 2002년에 중국에서 시작된 연구 프로젝트인 이른바 ‘동북공정’으로 인해 한국과 중국 사이에 격한 역사분쟁이 있었다. 고구려사와 발해사의 역사적 귀속 문제가 동북 공정의 쟁점이었다. 비슷한 일이 20세기 중반 태국과 중국 사이에도 있었다. 중국 남서부에 위치한 윈난(雲南) 지역의 고대사가 문제가 되었다.


현재의 윈난성은 다양한 족군(族群, ethnic group)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2019년 말 기준으로 약 4,858만 명의 인구 중 약 37%에 해당하는 약 1,795만 명의 ‘소수민족’이 윈난성에 거주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1949년 이래 수차에 걸친 인구조사와 ‘민족식별(民族識別)’ 작업을 통해 공식적으로 55개 ‘소수민족’을 구분하였다. 


현재 윈난성에 거주하는 공식 ‘소수민족’은 25종에 달한다. 아울러 윈난성은 전체 4,061의 국경선을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세 국가와 맞대고 있는데, 이 국경지대에 많은 ‘족군’들이 ‘국경을 가로질러’ 살고 있다.


이러한 윈난 지역의 고대사를 두고 태국의 ‘국사(National History)’와 중국의 ‘국사’가 충돌하였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화한 영국과 프랑스의 ‘동양학자(Orientalist)’들이 윈난 지역 고대사를 태국사로 귀속시키는 주장을 한 탓이다. 즉 8세기 중반 이후 윈난 지역을 장악하여 13세기 중반까지 존속한 남조국(南詔國) 및 대리국(大理國, 937~1253)의 역사를 태국사의 시작과 연결시키고, ‘타이(Thai)족 역사’의 일부로 위치 지웠다. 


그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태국의 타이족(Thai)과 미얀마 경내의 샨족(Shan), 그리고 윈난성 경내의 다이족(Dai; 傣族)은 본디 동족이다. 이 민족은 본래 중원 및 장강 유역에 거주하였는데, 한족(漢族)의 압박을 받아 윈난 지역으로 이주하여 독립 왕국을 세웠다. 그 왕국이 바로 남조국과 이를 이은 대리국이다. 마지막으로 1253년에 몽골 쿠빌라이의 공격으로 대리국이 멸망하자, 이들은 다시 윈난과 미얀마 및 태국의 연변 지역으로 이동하고, 또 대량으로 섬라(Siam; 暹羅) 지역으로 이동하여 섬라국을 이루는 주체 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1970년대까지도 별다른 검증 없이 서구와 동남아시아 역사학계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특히 태국에서는 비어있던 13세기 이전의 고대사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논설로서 확신되었다. 이 설은 1980년대까지도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겼으나, 이후 고고학상의 발견과 민주화와 더불어 나타난 태국 내 역사학계의 입장 변화로 인해 영향력이 쇠퇴하였다.


당연히 중국의 역사학계는 이 설에 반대하였다. 중화민국 시기부터 ‘남조왕국’과 그 족원 문제에 크게 집착하였고, 남조국의 왕족은 다이족이 아니라 바이족(白族)이나 이족(彝族)의 선조였으며, 또 남조국은 바이족과 이족의 선조들이 연합하여 세운 국가라는 학설을 내어놓았다. 


중화민국을 이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는 중국사 범주 논쟁을 거쳐 “중국은 자고(自古)이래로 통일적 다민족(多民族)국가”이며,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는 중국사라는 관점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이 논리 틀 안에서 남조국과 대리국을 비롯한 윈난 지역의 역사를 자국사 즉 ‘중화민족’사에 귀속시켰다. 또 최근에는 형제민족 사이의 평등한 관계보다는 변경지역에 대한 중앙의 통치 방식이나 제도를 강조하는 ‘변강사(邊疆史)의 관점에서 그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에드워드 카(E. H. Carr)의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언설에 공감한다. 그런데 중국 역사학계의 주장은 과거, 즉 사료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거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현재주의적’이고 ‘일국사’적 관점에 따른 정치적 주장일 뿐이다. 우선 그들이 말하는 중국사의 범주가 역사상 ‘중국’의 범주와 일치하는지가 증명되어야 하며, 또 바이족과 이족 그리고 그들의 선민이 ‘중화민족’을 구성하는 일원인지도 학술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한편 고구려사와 발해사 귀속 문제에 대한 한국 학계의 대응이 합리적이고 학술적이었는지도 차분히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을 ‘국사’ 패러다임의 한계에서 찾는 본교 사학과 임지현 교수의 주장에 귀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국사’ 패러다임이 지닌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본교 사학과 김한규 명예교수의 주장 또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한중관계사』, 『요동사』, 『천하국가』 등의 저작을 통해 민족 혹은 국민국가 대신 ‘역사공동체(나라)’를 역사서술 단위로 설정하자고 제안한다. 국가명과 ‘나라’ 이름을 구분하고, ‘중국’과 ‘한국’을 수천 년 동안 꾸준히 확장해 온 ‘나라(역사공동체)’ 이름으로 간주한다. 이를테면, 한 무제가 고조선을 멸하고 그 땅에 군현을 설치했는데, 이 군현은 한 제국에는 속하지만 ‘중국’에는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인들이 한사군 지역을 ‘중국’으로 여기지 않았고, 옛 고조선 땅에 살던 사람들을 ‘중국인’으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김한규 교수는 ‘한국역사공동체’와 ‘중국역사공동체’ 사이에 ‘요동역사공동체’를 설정하였고, 한국과 중국 사이에 논쟁이 되었던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요동역사공동체’의 역사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요동 이외에도 ‘중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6개의 역사공동체를 더 설정하였다. 이에 따르면, 윈난 지역의 고대사는 ‘저강(氐羌)역사공동체’의 역사에 귀속된다.


정면 (‘중국고대사’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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