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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크고 작은 대립에 관한 기사들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가뜩이나 COVID-19라는 세계 공동의 적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우리의 삶과 마음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다. 과연 누구를 위해 미디어가 존재하는가? 미디어가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서로 진심을 더 잘 공유할 수 있는 것일까? 첨단의 미디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날수록 미디어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의 자폐적 틀에 더욱 갇히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미디어는 사회비판적 기능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 비판의 잣대를 상대에게만 들이대고 ‘나는 항상 옳다’는 오만에 빠져 있으면 미디어의 기능은 마비된다. 더 나아가, 상대방의 단점 찾기에만 몰입하다 보면 상대방의 장점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한술 더 떠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안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미디어를 이용한다면 서로 상대의 단점에만 집중해 ‘신뢰 속의 화합’은 요원해진다.


지금은 듀크대학 총장으로 재직 중인 빈센트 프라이스 교수가 스탠포드대학에 있을 때 쓴 논문 중에 인상적인 것이 있다. 그는 당시 ‘Stanford Daily’라는 학생신문을 활용해 신문 기사에서 커리큘럼 조정에 관한 인문계와 자연계 학생 간 갈등을 제목부터 강조한 조건과 그렇지 않은 조건, 이렇게 두 개의 버전을 만든 다음, 학생들의 의견이 양극화되는 정도와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인문계와 자연계 학생 간 갈등을 강조한 기사 조건에서는 의견 양극화가 발생하였고, 갈등을 강조하지 않은 조건에서는 의견 양극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전자에서 양극화가 발생하게 된 과정은 먼저 (1) 학생들의 소속집단 정체성이 뚜렷해지는 상황이 있었고, (2) 각 소속집단 학생들이 자기 집단의 의견을 실제보다 더 극화시켜서 지각했고, 즉 인문계 학생은 더욱 인문계에 유리한 쪽으로, 자연계 학생은 더욱 자연계에 유리한 쪽으로 지각했으며, (3) 이렇게 극화시켜 지각한 자기 집단 의견 쪽으로 각각 동조하는 현상이 발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의견 양극화’가 나타났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미디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사회심리학적 편파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선택적 노출,’ 그리고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을 지지하는 정보만 믿는 ‘확증 편향’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균형을 잃지 않으려 최대한의 노력을 하더라도 일정부분 인간으로서의 한계에 부딪칠 때가 많다.


인간 사회의 삶에 갈등과 대립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갈등과 대립이 미디어에 선정적으로 보도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실제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지각한다. 그러면 그 갈등과 대립을 해결해 화합의 길로 나아가려는 시도조차 하기 머뭇거려질 수 있다.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자로서 “Resistance of Identity-Relevant Beliefs under Threat from an Antagonistic Outgroup” (Yale University, 1992)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할 때부터 줄곧 고민해 오던 집단 간 설득 저항 이슈가 21세기 하고도 4반세기를 바라보고 있는 이 시점에까지 크게는 지구촌 이곳저곳에서, 작게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대학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회의가 들기도 한다. 


미디어가 발전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참된 마음의 교류가 더 잘 일어나야 마땅하건만, 발전한 미디어를 다소 왜곡된 방식으로 활용하려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염려스럽다. 심지어 ‘가짜 뉴스’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도 자기 의견과 비슷하면 가짜 뉴스가 아닌 것으로, 자기 의견과 반대되면 가짜 뉴스인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이 인지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정보처리 과정이기에, 어쩌면 ‘내 생각에도 혹시 편파가 개입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정도의 겸손함을 기본적인 마음가짐으로 지니고 있는 것만이 그나마 너무나 많은 진짜와 가짜 정보가 난무하고 있는 미디어 포화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모두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상대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상대방도 우리만큼 주어진 상황 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만 해도 조금은 상대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다. 그러면 상대에게 품었던 분노의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질 수 있고, 분노했을 때는 당장 눈앞의 사건에만 집중하게 되어 넓게 보지 못했던 ‘주의집중 근시안(attentional myopia)’에서 벗어나게 되어 좀 더 크고 넓고 장기적인 안목이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사람은 서로에게 거울이 된다. 상대를 잘 속이는 사람은 상대도 자기를 속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상대를 잘 믿는 사람은 상대도 자기를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마의 땀방울이 선선한 초가을 바람으로 조금씩 위로받고 있는 학기 초, 인간을 연구하는 미디어 학자로서 포용과 화합의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미디어와 미디어 이용자가 더욱 많아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나은영 (‘미디어심리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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