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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에 초등학생 아들과 뮤지컬 <마틸다>를 보러 갔을 때 필자는 다소 황당한 일을 당했다. 이미  원작 소설을 읽은 아들이 여성인 트렌치불 교장을 남자가 연기하는 것을 보고 필자에게 귓속말로 “왜 배우가 남자에요?”라고 묻는 순간 어셔가 달려와 “공연 중에는 말을 하면 안 돼요!”라고 우리를 나무란 것이다. 수없이 많은 공연을 보았지만 그 정도의 일로 무안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수업 시간에 이 경험을 나누니 학생들이 얘기해줬다, 교수님이 “관크한 것”이라고.


“관크”란 관객과 크리티컬을 합성한 신조어로, 공연을 관람하며 다른 관객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를 뜻한다. 관크의 대표적인 유형에는 공연 중에 휴대 전화를 사용하거나 늦게 입장하는 것이 있고, 옆 사람과 귓속말을 하거나 남들이 웃지 않을 때 웃는 것도 있다고 한다. 주로 많은 돈을 주고 관람하는 공연의 열혈팬들, 특히 특정 배우를 보러 오는 회전문 관객들이 관크를 크리티컬하게(비판적으로) 바라보는데, 심지어 어떤 공연에서 한 관객이 자신의 옆에서 코를 고는 옆자리 관객 때문에 관람에 방해를 받았다며 그 사람을 깨우지 않은 어셔의 책임을 물어 극장에 관람료 환불을 요구한 사건도 있었다. 그런 사건이 반복되며 비싼 뮤지컬을 공연하는 극장들은 어셔들에게 어떤 종류의 관람 방해 행위도 다 주의를 주라고 교육시킨다고 한다.


필자는 방해 받지 않고 공연을 관람하고 싶은 열정까지도 비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언제부터 연극 공연장이 이렇게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해졌는지 좀 의아하다. 관객은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해졌을까.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시기(16세기말)의 연극 관객은 현대의 스포츠 경기 관객과 비교할 수 있다.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보면 야외 원형 극장 무대 앞에 사람들이 서서 공연을 관람한다. 이들은 그라운들링이라 불리는 관객들로 뒤쪽 자리에 앉은 사람들보다 훨씬 적은 돈을 내고 입장한 사람들인데, 이들은 무대 바로 앞에 서서 기분에 따라 야유와 환호를 하며 무대에 과일을 던지기도 했다. 또 당시 극장에는 오렌지 웬치라고 부르는 여성들이 공연 중에 돌아다니며 오렌지를 팔았는데 사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성매매 여성들이었다. 이렇듯 셰익스피어 시대의 극장은 떠들썩하고 감정에 충실한 관객들로 가득했다. 


18세기 유럽의 극장은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일 뿐 아니라 자신을 과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유럽의 오래된 극장에서 관객석 양쪽 위로 돌출된 박스석을 볼 수 있다. 사실 그 자리는 공연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관객들이 나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다. 내가 무슨 옷을 입고 무슨 보석으로 치장하고 누구와 함께 왔는지, 소위 셀럽들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극장을 찾고는 했다. 심지어 어떤 귀족들은 웃돈을 주고 무대 위에 자리를 마련해 앉기도 했다. 인스타그램이 없던 시절 극장은 나를 과시할 수 있는 홍보의 장이었다. 


극장에서 관객들을 점차 조용히 시킨 것은 놀랍게도 조명 기술의 발전이었다. 가스등이 발명되기 전까지 극장의 조명은 촛불과 횃불이었다. 실내 극장의 관객석 위에는 샹들리에가 있었고 거기에서는 촛농이 쉴새 없이 떨어졌다. 막이 올랐다고 촛불을 다 끌 수도 없었다. 따라서 관객석에는 공연 내내 불이 켜져 있었다. 19세기 초에 가스등이 발명되며 관객석의 소등이 가능해졌고 그때부터 점차 관객들의 움직임이 줄었다고 한다. 20세기 초 전깃불이 보급되면서 무대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게 밝아졌고 관객석은 상대적으로 완전히 어두워졌다. 관객들이 조용해진 것에는 사실주의적인 무대 연출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관객들은 이제 공연 중간 나가는 것도, 저쪽에 앉은 친구에게 손 흔드는 것도 어려워졌다. 


우리 나라의 전통 연희 역시 조용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 남사당패는 마을 한가운데에 판을 벌리고 공연을 했는데 연극적인 종목에 해당하는 덧뵈기(탈놀이)와 덜미(꼭두놀음) 모두 관객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남사당패보다는 정적인 연희인 판소리도 고수와 관객이 함께 넣는 즉흥적인 추임새로 완성된다. 지금도 창극을 보러 가면 숙달된 관객들이 공연 중간중간 “좋다!” “그렇지!” 등의 추임새를 넣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럴 때 창극이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은 당황하는데, 몇 번 겪다 보면 너무나 흥겨워서 내 입술조차 추임새를 한번 넣어볼까 씰룩 거릴 때가 있다. 


작년 말, 필자는 <마틸다>를 보았던 바로 그곳에서 이보 반 호프가 연출한 <로마 비극>을 관람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세 편을 하나로 엮은, 장장 여섯 시간의 공연이었다. 이 작품의 진정한 묘미는 그러나 어마어마하게 긴 러닝타임에 있지 않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공연 중에 돌아다니고, 사진을 찍고, 음식을 먹고, 심지어 무대 위에 올라갈 수도 있었다. 관객들은 원한다면 오열하는 클레오파트라 바로 앞에 누워 그녀의 눈물과 비말을 온몸으로 맞을 수 있었다. 관객의 모습은 배우들과 함께 무대 곳곳에 놓인 카메라에 잡혔고 그 화면은 고스란히 큰 스크린을 통해 무대 곳곳의 모니터로 중계되었다. <로마 비극>의 관객은 단순히 예술가들의 메세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시저의 살해를 함께 도모한 공범이자 안토니오의 몰락을 목도한 시민이다. 같은 작품을 봤어도 저마다 경험하고 느낀 것이 다른 공연이었다.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에서 연극이 가지는 의미가 변함에 따라 공연에서 관객의 역할 역시 변해왔다. 홀로그램을 비롯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로 인해 라이브니스의 의미가 변해가는 지금, 가까운 미래의 공연은 관객에게 또 전혀 다른 몫을 요구할지 모른다. 다시 그라운들링이 부활할지도, 아니면 관크가 멸종할지도 모르는 그 미래가 나는 궁금하다. 


박주희(‘세계연극사’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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