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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은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현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룩한 학문 체계며, 따라서 물리학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는 자연과 생명의 이해에 있다. 물리학은 자연현상에 대해 근본적 원리에 입각한 보편지식을 추구하며 이를 바탕으로 합리적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물리학이 실용 자체를 강조하는 공학이나 개별적 지식을 추구하는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과 같은 다른 학문과의 중요한 차이는 물리학은 근본적인 법칙과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물리학은 기초과학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공학 분야를 포함하는 이공계 학문의 기초가 된다. 특히 현대 물리학은 첨단 기술의 발전을 선도할 뿐 아니라 우주와 생명의 근원에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필자는 2019년 두 학기에 걸쳐 '우주와 원자시대'란 제목으로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강의를 통해 물리학을 중심으로 과학자들이 어떻게 시행착오를 통해 위대한 발견과 발명을 이루었으며 당대의 지적 편견과 한계를 극복하고 어떻게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 가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강의를 통해 교육이 지향해야 할 창조적 인간의 전형을 그려보고 싶은 바람이 있다. 또한 20세기 물리학의 풍경을 조망하고 당대의 지식체계가 직면한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21세기에 새롭게 펼쳐질 물리학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학생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 지면을 빌려 한 물리학자의 개인적 소견임을 전제로 이 전망을 그려보고자 한다.
 
20세기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꽃피운 물리학의 시대였다. 그러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이름 붙였다. 제1, 2차 세계대전부터 소련의 붕괴까지 20세기는 극단에서 극단을 오간 시대였다. 서구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극단적으로 번성한 시대인 동시에 자본주의가 대공황으로 위기에 직면하고 제국주의가 파멸적인 전쟁으로 돌진한 시대이기도 하다. 인류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힘으로 만들어진 원자폭탄이 실제로 사용되기도 했고 이 와중에 물리학자들은 그들의 손에 피를 묻힌 원죄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극단의 시대답게 수많은 꿈이 생산됐고, 그 수많은 꿈이 환멸 속에 사라졌다. 그 몽상들의 핵심에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그 사제인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있었다. 과학기술이 사회 변혁의 핵심 변수가 된 20세기의 혼란을 21세기에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학과 사회, 우주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심도 깊은 탐구가 필요할 것이다.
 
양자역학이 추동한 현대 과학의 발전 과정에서 주목할 사실은 그동안 물리학의 주류적인 사고였던 간단한 법칙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결정론과 부분을 알면 전체가 보인다는 환원론적인 사고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통계물리의 주요 대상인 응집 물질, 복잡계, 생명체와 같은 많은 수의 구성요소들이 상호작용하는 다체계에서는 예측 불가능성과 함께 근본적인 법칙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집단현상이 나타나고 환원주의보다는 전체론적인 관점이 실제 대부분의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이러한 다체계에서 나타나는 창발하는 대칭성과 질서는 21세기 물리학을 규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리학의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21세기에서 복잡계와 전산물리의 협업을 통해 그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것이다. 현재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딥러닝(deep learning)과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양자 컴퓨터와 인공지능(AI)의 발전은 과거에 상상하지 못했던 복잡계와 거시계에 대한 정량적이고 해석적인 계산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또한 뇌과학과 관련하여 뇌의 연산과 같은 고급 인지기능의 생물 물리학적 모델을 정립하고, 새로운 지능적 정보처리 알고리듬을 개발, 구현하는 것과 신경계의 정보처리를 모방한 신경 컴퓨터의 개발은 인공지능의 발전에 중요한 촉매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그리고 현재 막 태동하고 있는 양자 생물학(quantum biology)은 생명현상의 신비에 대한 양자역학적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결국 21세기는 생명과학의 시대이고 곧 그 열매들이 쏟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물리학적 방법론에 기초한 21세기 생명과학은 20세기가 겪은 혼란보다 더 광범위하고 파괴적인 혼란을 초래할지 모른다. 저명한 이론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의 주장처럼 20세기 과학의 원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대중적으로 확산하여 과학자만이 아니라, 더 많은 대중이 과학기술에 대해 논의하고, 개입하고, 조정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권력자와 자본가들을 통제해야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다체계에서 나타나는 창발하는 물리적 실재의 개념은 20세기에 근본적인 물리학이라고 간주했던 입자 물리학의 표준모형과 같은 이론에도 적용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21세기 물리학의 큰 축인 양자 중력은 플랑크 길이(Lp=10-35m)로 알려진 양자 시공간이 작동하는 극미의 스케일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플랑크 길이를 1m라고 한다면 현재 인류가 (유럽의 입자가속기 LHC로) 탐침한 가장 작은 길이인 10-20m마저도 태양계의 최외각 영역인 Oort Cloud에 해당한다. 플랑크 스케일에서 볼 때 입자 물리학의 영역은 수없이 많은 '시공간 원자'들이 응축되어 나타나는 거시적 다체계이며 입자 물리학의 여러 성질은 이러한 다체계로부터 창발하는 물리적 실체일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익숙한 시공간마저도 태초부터 존재하는 근원적인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어떤 객체들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발현되는 성질일지 모른다. 이른바 '창발하는 시공간'으로 알려진 이 새로운 개념은 20세기 물리학이 구축한 시공간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며 우주와 시공간의 기원을 밝힐 수 있는 21세기 물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리라 생각한다.

  • 양현석(‘우주와원자시대’강의)
  •  승인 2019.11.25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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