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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와 ‘최후의 심판’ 등으로 르네상스의 절정을 주도한 미켈란젤로에게 어떻게 이토록 아름답고 작품을 만들 수 있었느냐는 칭송 어린 질문을 했을 때, 그의 답은 간단했다. 대리석 안에 이미 그 형상이 있었고, 그것을 본 자신은 그 형상에서 불필요한 부분들을 모두 깎아내기만 하면 되었다고 말이다.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대개 원석의 심연에서 그 미적 형상을 직관할 수 있었던 예술가의 창의적 발상이나 그 행운에 흥미를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조각품의 잉여, 그러니까 깎아내 버려진 대리석 파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쓰레기가 되는 삶들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렇게 질문한다. “르네상스의 전성기에 미켈란젤로는 현대의 창조를 이끌게 될 계율을 선포한 셈이다. 쓰레기의 분리와 파괴는 현대적 창조의 비법이 되었다. 여분의 불필요한, 쓸모없는 것을 잘라내 버림으로써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만족스럽고 좋은 것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쓰레기 문제에 다각적인 관심을 보인다. 그가 보기에 ‘쓰레기는 모든 생산의 어둡고 수치스러운 비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더는 비밀이 아니게 된 게 아닐까? 바우만처럼 다시 물어보자.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빚어낼 때 버려진 대리석 파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현대의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잉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일부는 매립장으로, 일부는 소각장으로 갔을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마구잡이로 아무 데나 버려졌을 수도 있다. 한국의 생태시인 최승호는 「물 위에 물 아래」라는 시에서 물속에 버려졌다고 보고한다.


관광객들이 “호수를 둘러싼 호텔과 산들의 경관에/ 취하면서 유원지를 향해” 호수를 건너갈 때, 즉 물 위의 풍경만을 보고 있을 때, 시인은 물 아래에서 심연의 생태를 관찰한다. 그 물 아래 현실은 문명의 쓰레기들로 가득하다. 이렇듯 물 아래 수부의 눈은 물 위 관광객의 눈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물 위의 풍경 또한 시인은 정직하게 조망한다. 물 위의 지상의 풍경은 마치 집단 발광을 일으킨 것처럼, 혹은 世紀末의 묵시록을 연상케 할 정도로 파괴적이다. 가령 ‘죽은 胎兒들이 녹슨 자전거를 타고/ 엄마를 부르며 붉은 바다 밑을 달리는 밤’ (「赤身」)과 같은, 그로테스크한 풍경들이 물 위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 물 위의 땅은 한 마디로 아주 끔찍한 ‘공장지대’다.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 끈들.
저 굴뚝들과 간통한 게 분명해!
자궁 속에 고무 인형 키워온 듯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들을 하루종일 뽑아댄다.


- 공장지대 전문


참으로 끔찍한 관찰이고,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몸과 공장지대는 분명한 대립소다. 그 안에 배꼽/비닐 끈, 자궁/고무 인형이라는 불행한 대립소들이 들어 있고, 이 어울리지 않는 대립소들의 조합으로 몸은 굴뚝과 간통한 형국이 되고, 그 결과 산모는 무뇌아를 낳게 되고, 젖은 허연 폐수처럼 흐른다. 인류 문명의 폐해가 끝까지 진행되었을 때, 혹은 결코 머잖은 미래에, 몸 안에 공장지대가 과감히 상륙하고 몸은 공장지대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몸의 미래, 인류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인식은 매우 도저하다. 공장지대에서 죽음의 암세포는 매우 빠른 속도로 번진다. 그 어느 곳에서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삶의 자리는 고스란히 죽음의 자리로 뒤바뀐다. 그런데도, 사태가 이처럼 심각하지만, 인간은 본질적 반성도 이렇다 할 대책도 없이 공장지대를 건설하고 굴뚝을 세운다. 그리고 쓰레기를 방출한다. 인간의 몸을 간통하고 관통하는 굴뚝은 몸 밖의 공장지대의 환유이지만, 그것 역시 인간 몸 안의 욕망에서 나온 것임을 시인 최승호는 간파한다.


이렇게 최승호는 반생명적이고 반 생태적인 문명 현실과 자본주의 생태를 비판적으로 조망하면서 쓰레기 문제를 전경화한다. 쓰레기를 비롯한 여러 생태 문제가 인류 문명 전체 혹은 지구라는 유기적인 생명 공동체 전반에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특히 세속적 문명의 살풍경과 그것을 야기하는 인간의 무정부적 욕망과 욕망의 환각 상태를 집요하게 비판한다. 생태학적 전체성이 훼손된 타락한 문명 현실을 비판하는 그는, 환(幻)의 현실을 멸(滅)하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환의 현실에 더 깊숙이 틈입해 들어가는 그로테스크한 시적 담론을 묘출한다. 그것을 통해서 환멸의 파토스의 심연으로 이르고자 하며, 그 과정을 거쳐 虛, 無, 空의 우주를 응시한다. 타락한 생태 현실과 그 기저에 도사리고 있는 타락한 인간 욕망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서 선(禪)적 투시와 직관에 이르고 있는 그의 시편들은 현대 문명에 대한 대안 명제의 수사학이다.


그가 상상하는 대안 세계의 모습은 이러하다. ‘나의 내장들이 철사가 아니라/ 넘쳐흐르는 샘물과 속삭이기를/ 나의 꿈들이 사해(死海)가 아니라/ 낮은 풀들과 두루미와 성스러운 영혼들과 속삭이기를’ (「반죽」). 욕망을 조절한 상태에서 신생을 위한 발효를 소망한다. 「반죽」에서도 그랬듯이 「발효」에서 시인은 ‘소망의 형식으로 신생의 기획을 도모한다. 물과 진흙이 어우러진 반죽에서 흰 갈대꽃이 피고 잉어와 물오리 떼들이 힘차게 살아 움직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 발효하는 숨결이 화자의 마음에도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물 아래서 수부가 관찰한 죽은 물의 생태 현실과 공장지대에서 무뇌아를 낳은 산모가 바라본 물 위의 죽은 생태 현실이 이런 모양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시인은 희구한다. 상실한 생태학적 전체성의 회복을 향한 간절한 소망이다.


  • 우찬제 (문학비평가/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19.05.13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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