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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는 한글 자막보다 영어 자막이 더 편해.”


이 문장에서 혹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는가? 아마도 개인에 따라 이상한 점을 느낄 수도 있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예상하기로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경우가 더 일반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위 문장에서 도대체 무엇이 이상하다는 것일까. 그 ‘이상한 점’은 바로, 서로 대등한 비교 대상이 아닌 ‘한글’과 ‘영어’가 비교 대상으로 거론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글은 ‘문자’인데 반해 영어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처럼 ‘문자’의 신분인 한글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언어’의 신분으로 탈바꿈해 가고 있는 현상을 지적하고, 이 현상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간략히 밝혀 보고자 한다.

오늘날 ‘한글’이 ‘문자’를 넘어 ‘언어’의 의미로까지 쓰이고 있음은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대화 중 발화 실수를 한 친구에게 “너는 한글도 모르냐?”라고 타박하는 경우라든가, “(글을) 영어로 쓰는 것보다 한글로 쓰는 게 더 어려워.”라고 말하는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또한, 요즘 웬만한 4년제 대학에서 꽤 일반화된 ‘영어(로 진행하는) 강의’에 대비(對比)하여 우리말로 진행하는 강의를 “한글 강의”라고 지칭하는 학생들도 많이 있다. 심지어 ‘국어사전’을 가리켜 “한글사전”이라고 부르는 다큐멘터리 제목도 있다(2010년 EBS 한글날 기획특집 다큐멘터리 <우리말 모아모아 말모이: 한글사전의 치열한 탄생보고서>).

이상에서 언급한 예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 본다면, 우리는 이들이 ‘정상적이지 않은’ 용법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1) (영어로 대화하던 중 발화 실수를 한 친구에게) “너는 로마자도 모르냐?”
(2) “(글을) 일본어로 쓰는 것보다 로마자로 쓰는 게 더 어려워.”
(3) “로마자(로 진행하는) 강의”
(4) <로마자사전의 치열한 탄생 보고서>

(1)~(4)는 ‘영어’를 ‘로마자’로 대치해 본 것인데 모두 매우 어색하게 들린다. ‘언어(영어)’가 쓰여야 할 맥락에 ‘문자(로마자)’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어’와 ‘한글’의 경우 전자의 맥락에 후자를 쓰는 화자가 많다는 사실은, 가히 ‘한글’로써 ‘한국어’를 완전히 대치할 수도 있겠다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글’의 이러한 용법을 잘못이라고 규정하는 규범주의적(prescriptive) 태도이다. 한글은 어디까지나 문자이므로 그것이 언어(한국어)를 가리키는 용법은 ‘비문법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글이 이미 문자의 의미를 넘어 언어(한국어)의 의미까지 획득하였다고 보는 기술주의적(descriptive) 태도이다. 이미 언중이 ‘한글’을 ‘한국어’의 개념으로도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한국어 문법의 엄연한 사실로 기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 태도일까. 필자는 여느 언어 현상에 대해서는 기술주의자이기를 표방하지만, 유독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규범주의자로 남아 있다. ‘한국어:한글’, ‘영어:로마자’, ‘일본어:가나 문자’, ‘러시아어:키릴 문자’ 등과 같은 ‘언어:문자’의 체계적인 대응 관계를 현실과의 타협 속에서 포기하기가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지 않은 화자들이 현재 ‘한글’을 ‘한국어’의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실 규범주의와 기술주의는 문법 연구의 목적에 따라 연구자가 취하는 태도일 뿐, 둘 중 어느 하나가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판단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다만, 설령 기술주의를 택하더라도 ‘문자(한글)’와 ‘언어(한국어)’의 개념 자체를 혼동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세종이 ‘한국어’를(!) 창제하였다고 믿고 있는 꽤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다. 세종이 한국어를 만들었다면 그전까지 우리 조상들은 도대체 어떤 언어를 구사하였다는 말인가. 또한, 매년 한글날이 되면 외국어ㆍ외래어ㆍ(청소년의) 외계어의 범람을 개탄하는 언론 보도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서는 “세종대왕께서 지하에서 통곡하신다”와 같은 상투적 표현이 자주 목격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이와 같은 보도는 ‘언어(한국어)’ 현상을 다룬 것이지, ‘문자(한글)’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에는 외국어 및 외래어를 충실히 표기하기 위함도 있었으니, 사실 외국어ㆍ외래어ㆍ외계어가 넘쳐 나서 한글로 매우 잘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세종대왕께서 지하에서 기뻐하실 만한’ 일이라고 하겠다.

요컨대 ‘한글’을 ‘한국어’의 뜻으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문자’와 ‘언어’의 개념은 분명히 구분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참된 정신과 한글날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 김한별(‘국어학입문’,‘국어방언론’강의)
  •  승인 2019.04.01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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