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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신체를 잠식한다. <명의>나 지금은 종영된 <위기탈출 넘버원> 같은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삶의 여러 상황 속에 있을법한 사고의 유형과 그 대비책이 아니다.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침입해 안전에 대한 앎을 각인하고 허용 (불)가능한 행동의 범위를 구획하는, 그럼으로써 결국 불안을 삶 깊숙한 곳까지 침투시키는 불안의 정치학이다. 안전에 대한 집착은 동시에 불안을 증폭시키는 것이기도 한데, 문제는 불안이 그 자체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안개와도 같이 여기서 저기로 또 시시때때로 불거지면서 그 전염성을 퍼뜨린다는 것이다.
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전제하는 까닭에 ‘만약의 경우’조차도 그 대상으로 삼아버린다. 그것은 삶 전체가 잠재적 위기 상황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어느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과도 같은 ‘주의 사항’을 신체 위에 아로새긴다. 바로 여기서 불안이 신체를 향하는 위험 요소에 대한 말초적 경계와 함께 그 동물적 보편성에 힘입어 그야말로 집합적 인구의 수준으로까지 확장된다.
당연하게도 신체를 관통하면서 작동하는 불안의 정치학은 몇몇 TV 프로그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불안은 온갖 매체와 콘텐츠를 통해 신체에 직접 가닿는다. 건물붕괴, 산업 재해, 인명 피해, 자동차 사고, 자연재해, 화재에서부터 뇌출혈, 심장병, 암, 치매, 심지어는 에이즈에 이르기까지 각종 재난과 질병들이 우리의 일상을 촘촘하게 둘러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는 각종 범죄들은 불안을 일상 여기저기에 스며들게 하며, 그 결과로 무인 방범시스템, 블랙박스, 사설경비업체, CCTV 등 온갖 종류의 방범 장치를 일상 속에 포진시킨다. 이뿐인가. 자기계발 역시 미래에 대한 불안, 곧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세대가 갖는 막연함과 초조함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던가. 그나마 자기계발이라도 해야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런 한에서만 미래에 대한 불안을 현재의 최선으로 위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의 정치학

불안은 신체를 잠식한다. ‘긴급출동 24시’, ‘명의’, ‘위기탈출 넘버원’ 같은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삶의 여러 상황 속에 있을법한 사고의 유형과 그 대비책이 아니다.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침입해 안전에 대한 앎을 각인하고 허용 (불)가능한 행동의 범위를 구획하는, 그럼으로써 결국 불안을 삶 깊숙한 곳까지 침투시키는 불안의 정치학이다. 안전에 대한 집착은 동시에 불안을 증폭시키는 것이기도 한데, 문제는 불안이 그 자체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안개와도 같이 여기서 저기로 또 시시때때로 불거지면서 그 전염성을 퍼뜨린다는 것이다.
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전제하는 까닭에 ‘만약의 경우’조차도 그 대상으로 삼아버린다. 그것은 삶 전체가 잠재적 위기 상황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어느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과도 같은 ‘주의 사항’을 신체 위에 아로새긴다. 바로 여기서 불안이 신체를 향하는 위험 요소에 대한 말초적 경계와 함께 그 동물적 보편성에 힘입어 그야말로 집합적 인구의 수준으로까지 확장된다.
당연하게도 신체를 관통하면서 작동하는 불안의 정치학은 몇몇 TV 프로그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불안은 온갖 매체와 콘텐츠를 통해 신체에 직접 가닿는다. 건물붕괴, 산업 재해, 인명 피해, 자동차 사고, 자연재해, 화재에서부터 뇌출혈, 심장병, 암, 치매, 심지어는 에이즈에 이르기까지 각종 재난과 질병들이 우리의 일상을 촘촘하게 둘러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는 각종 범죄들은 불안을 일상 여기저기에 스며들게 하며, 그 결과로 무인 방범시스템, 블랙박스, 사설경비업체, CCTV 등 온갖 종류의 방범 장치를 일상 속에 포진시킨다. 이뿐인가. 자기계발 역시 미래에 대한 불안, 곧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세대가 갖는 막연함과 초조함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던가. 그나마 자기계발이라도 해야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런 한에서만 미래에 대한 불안을 현재의 최선으로 위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것은 아마도 이처럼 신체(의식으로 환원 불가능한 물질적인 것)에 대한 포섭 이후에, 이에 대한 착념과 몰두가 불러일으킨 결과가 아닐까. 그렇기에 불안을 철저히 개인의 심리 상태에 국한하는 것이야말로 신체를 관통하면서 유포 및 생산되는 불안의 물리학을 간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불안은 단순히 영혼에 대한 치료, 곧 흔히 회자되는 ‘힐링’ 따위로는 도무지 치료 불가능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불안의 원인을 철저히 개인의 심리적·정신적 상태로 환원하고 또 거기서만 작동하려 들기 때문이다. 여기엔 신체를 가로지르면서 불안을 유발하고 생산하는, 그럼으로써 불안과 함께 통치를 이룩하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질문이 삭제돼 있다. 요컨대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기 위해서라도 그 전제로서 신체를 직접 겨냥할 수밖에 없다면, 다시 말해 어떤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매개를 통해서만 불안이 그 효력을 관념에서 현실로 이식할 수 있다면, 중요한 것은 이처럼 신체를 통해서 가시화되고 있는 불안이 어떻게 정확히 정치적인 것들과 연결돼 있는지를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불안은 신체를 매개로 해 개인과 인구를 연결한다. 신체가 개인의 것이면서 동시에 인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불안은 드디어 신자유주의의 한가운데로 치닫는다. 불안은 신자유주의의 기제가 된다. 바꿔 말해,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 불안을 스스로의 재생산을 위한 견고한 토대로 삼는다. 그것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불안이며 미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불안이자 범죄의 위협 속에 사는 이웃의 불안이고 병든 노후를 걱정하는 부모의 불안이기도 하다. 실로 개인의 불안이자 모두의 불안이다. 신자유주의는 그 수많은 불안의 다발들을 모아 공적부조와 사회복지, 상호연대의 모색 대신 대부업체와 금융회사, 경비업체, 보험사들 앞으로 우리를 ‘친절하게’ 안내한다.
그러나 이처럼 불안의 기운을 퍼뜨리면서도 이에 대한 해법은 순전히 개인의 차원으로 한정해버린다. 정규직 확대 대신 기필코 정규직이 돼야 한다는 개인적 욕망을 부추기고 등록금 인하 대신 학자금 대출 기회를 늘려가면서, 그리고 질병·빈곤·실업·재해 등 사회적 위험에 대한 복지 시스템을 개인 보험 가입으로 대체하고 이 모든 과정에서 불안을 생산하고 유통하면서,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통치와 인구의 통치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해낸다. 따라서 이 시대의 불안은 더 이상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일반적인 감정 혹은 정서에 머무르지 않는다. 불안은 통치의 기술 중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자 그러한 통치가 근거하는 전제인 셈이다.
당연하게도 여기에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처방전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 처방전들은 중심을 빗겨나간 채 개인의 불철주야 노력을 강조하거나 그 원인을 타자(범죄자, 사회적 약자, 외국인 노동자)에게 돌려버리거나 혹은 영혼의 위안이나 힐링과 같은 자기최면으로 잠깐 동안 잊게 만들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처방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신자유주의가 불안과 함께 통치를 이룬다면, 다시 말해 불안을 생산하고 이를 관리하며 결국 잠식되게 만드는 이 모든 절차와 함께 통치가 작동한다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필연적으로 신자유주의 그 자체에 대한 싸움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 외의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안을 이길 수 있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더욱더 불안에 옥죄게 만드는 더 교묘하고 촘촘해진 불안의 정치학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 다시 묻자. 왜 불안하십니까?


  • 박승일('창의적말하기와글쓰기' 강의)
  •  승인 2018.11.28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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